김용택*

조금은 오래된 그림 한 장 - 김용택

효림♡ 2009. 9. 4. 21:13

* 조금은 오래된 그림 한 장 - 김용택  

산에 오는 눈이
강에 내립니다

방 안이 환하게 눈이 내리면 나는 이불 속에 엎디어 책을 읽고

아내는 부엌에서 불을 때서 고구마를 삶았습니다

민세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어 놓고

산을 그리며 강으로 내리는 눈송이들을 내다보았습니다

민해는 오빠가 뚫어놓은 문구멍까지 키가 닿지 않아

문을 열고 쿵쿵쿵 마루를 뛰어다니며 유리창 너머로

눈을 바라보다가 내 방에 와서 내 옆에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 엎딥니다

차디찬 민해 발이 내 몸 어딘가에 닿습니다

나는 차가워서 움찔 놀라고, 민해는 또 방문을 열고 쿵쿵쿵 마루를 뛰어 큰방으로 갑니다

"민해야, 아빠 방 문 닫고 가야지!" 민해는 또 쿵쿵쿵 뛰어와  방문을 쾅 닫고 갑니다

솥에서는 감자가 빨갛게 익고 있습니다

산에 오는 눈이
꽃잎이 되어 강으로 간답니다

빨랫줄에 빨래들이 하얀 눈을 쓰고 꽁꽁 얼고

머리깃이 노란 멧새들이 집 근처로 내려와 처마 밑

시래기 줄기에 앉아 시래기를 쪼아먹고 푸른 똥을 쌉니다

큰눈이 잔눈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함박눈으로 바뀌며 차곡차곡 쌓입니다

세상은 화선지처럼 하얗고 강물은 큰 붓자국처럼 휘휘 굽이돌며 힘찹니다

"민세야! 고구마 다 익었다. 얼른 가져가거라."

민세는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고구마를 들고 방으로 돌아오고

아내는 부엌을 나서며 옛날에 어머니가 하시던 말을 고대로 합니다
 "하따, 눈이 참 재미있게도 온다."

산을 그리는 눈이 
강을 그립니다 *

 

* 김용택시집[수양버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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