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산중에서 며칠 - 김용택

효림♡ 2009. 8. 27. 08:23

* 산중에서 며칠 - 김용택

 

내가 온 곳은

하루가 멀다 하게 눈이 오고, 눈이 오면 산길이 먼저 하얗게 드러났다가 먼저 녹았다. 길은 외길로, 산을 넘는다

눈 위로 얼굴을 내민 작은 돌멩이 얼굴이 젖어 있다

내가 보기에, 숲은 날마다 가만히 있다. 어제 본 소나무와 너도밤나무와 박달나무들이

오늘도 그 자리에 서서 나와 같이 저녁 눈을 맞고, 한번 누운 겨울 풀잎은 일어나지 못한다

길은 때로, 나에게로 와서 밟히고 내 뒤로 사라진다

바람이 불고, 말을 안한 지 며칠 되었다. 나무들이 내 몸에서 말을 꺼내간다

말할 사람이 없어, 아침이 너무 쉽게 와서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온다

나무들아! 하루종일 세상을 위해 할 말이 없는 아름다움을 너희들은 아는구나. 나무들을 끝까지 올려다본다

아!

끝이 어둠이라는 것을 알 만도 한데

도랑물은 얼음 밑으로 흐르며

돌부리에 사무친다. 오늘은 눈이 왔다가 녹고 눈이 또 오는 길을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길은 산 아래로 보였다

안 보였다 굽이굽이 이어져 있지만, 산 아래 마을 몇가옥 눈 녹은 남쪽 지붕은 무심했다

밤이 와도, 의외다. 산으로 간 길은 환하다. 혼자 타박타박 걸으면 내가 나무가 되기도 하고, 산이 되기도 하고,

눈이 되어 내리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내가, 내가 되기도 한다. 말이 생기면 그 말이 소용없을 때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와 불도 켜지 않고 잠을 잔다. 잠은 캄캄하고, 깊고, 초저녁 누운 그대로 일어난 아침, 빨리 온 아침은 밝고

내 몸은 환하다

때로 잠이 안온다. 나는 맑고 희다. 눈송이가 될 것 같다. 공중에 뜰 것 같고, 날아간다.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

마른 소나무 잎새를 지난다. 사이는 아름답다

마음이 시켜 산 하나를 넘어 해 저문 데까지 따라갔다가 돌아오면

나를 따라온 나무와 산새들이

내 길을

다 지우고 울며 돌아간다

돌아보지 않고 바라보지만 않는다면 딛고 선 삶은 나무처럼 아름다우리

두고 온, 그곳

내가 온

이곳 *

 

* 김용택시집[수양버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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