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석여공 시 모음

효림♡ 2009. 9. 11. 17:35
* 자서 - 석여공  

봄바람을 다관에 우려먹다 

창문 열어 세상을 바라보았네 

하늘 구름 봄빛을 희롱하는데 

철당간에 꽃 피면 알리 

새들 날며 마른 혀 적시는 마음 *

 

* 동백  

누가 첫 입술로 저 동백에 입맞춤했나

누가 저 동백 못 잊게 해서

들어오시라고, 성큼 꽃 속으로 동백길 가자고

붉은 몸 열어 만지작거리게 했나

저 동백 누가 훔쳐 달아나 버려서

혼자라도 그리운가 아득히

동백을 보면 언제나 춘정은 몸살지게 살아

나 아직 쿵쿵 뛰는 가슴이어서

그대여 저 붉은 귀에다 소식 전하면

그 길에 누워서 죽어버려도 좋겠네 *

 

* 봄, 꽃멀미
햇빛 좋은 날
그대 발등에서 진달래가 피는지
일지암 유천을 떠다 매화차를 먹었네
봄을 다 먹고도
그대를 여의지 못하는 것은
꽃봄에 마실 가듯 쓸쓸한 것이라네
그대 뜨락의 환한 목련은
바람이 무서워 꽃등을 버렸나
눈썹을 치고 가는 바람보다 더 가볍게
산 깊더니 물 깊더라
사랑 깊더니 상처도 깊더라
내 안에 짙은 신열의 이 꽃멀미는
그대가 주인인가
내가 주인인가 *


* 조팝꽃에 들다 
피거든 흔들리고만 있으라
내가 대신 요절하리
그 산에 꽃궁뎅이 꽉 붙이고
그대는 다만
눈 질끈 감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말라
조팝꽃 하얀 봄조차 눈부셔서
오호 서럽게 키 큰 꽃아
눈물나게 그리운 사람아 *

 

* 금산사 꽃살문

내가 아는 목수 신 씨가 꽃살문 새길 때는

끌 자루 거꾸로 쥐고 햇살 당겨

지 가슴팍에 꽃살 새긴다

꽃살문은 여래의 눈이 닿는 곳이라고

보살이란 나를 해치고 너를 살리는 것이라고

허공중에 휘두르는 빈 칼질이라도

세상 아프게 하면 안 된다고

햇살 당겨 지 가슴팍에 꽃살 새긴다

 

검버섯 잘 늙은 금산사 노스님은

어느 꽃살문에 고여 해바라기 하고 있나 

시월 잘 벼린 연밥에 앉아 

곰삭은 나이테로 늙은 스님아  

햇살 꽃살이 이빨 없는 잇살에 다시 피겠네

매화 당초 인동꽃에

웃는다 피멍든 꽃살들 *

 

* 오호
이 좋은 꽃봄에
매화꽃 상큼하고
개나리꽃 생강꽃 산수유가 노란데
벚꽃이 뭍을 향해
꽃사태를 시작했다는데
그대 안에

꽃등으로 밝고 싶은데
아프다니요
아프시면 어찌 합니까
바람 잃은 이 꽃내
오호
봄빛 좋은데 *

 

* 꽃 핀다 꽃 진다
지난겨울 어떻게 살았느냐고
차꽃 필 때 동백꽃 필 때 매화꽃 필 때
꽃향 머금고 좋았노라고
지난겨울 또 어떻게 살았느냐고
차꽃 질 때 동백꽃 질 때 매화꽃 질 때
그때마다 겨울 산에 등 기대고
먼 산 보았노라고
꽃 진 겨울 이마에 생 바람 불어도
참 맑았노라고
한철 꽃 피고 꽃 지는 마음아
이 세상 어찌 살 것이냐 묻는다 해도
꽃 핀다 꽃 진다 할 뿐 *

* 목련 아래 내 그림자
목련꽃 터지려고 한다
목련꽃 터지듯 내 지혜도 터지면
얼마나 좋을까
꽃 피어서 좋겠다고
꽃 보는 봄날 너무나 좋았다고
해맑은 그대 앞에서
나 아직 꽃잎 내밀지 못한 꽃받침이 되어서
한낱 눈 감을밖에 일이 없다
올해도 목련 피는데 너는 피는데
나는 무엇을 피우고 지는
꽃이더냐 하고 *


* 동쪽으로 기운 나무

동쪽으로 기운 나무 동쪽으로 넘어지나니

그대여 어느 곳에 발목 묻고 기울고 있는가

말하건데 어차피 기울 일이라면

차라리 젖은 돌담에게나 몸 기울어

그대여 마음이나 편히 눕혀 놓으시기를 * 

 

* 어쩌자는 것인가
내안에 소리없이 켜켜이 쌓이는
저 꿈 같은것들
그대는 문 밖에서 문풍지 바람으로 덜컹거리고
나는 마음 안에 빗장을 걸었다
쌓여서 어쩌자는 것인가
갈 길 막고 올 길도 막고
마음 안의 빗장
마음 밖의 빗장
봄 오면 길 뚫릴 것을
그렇게 쌓여서 어쩌자는 것인가
 *

 

* 달팽이를 말함

사람들은 집을 지어 거기 깃들어 살고

죽어 그 집 끌고 저승길 가지 못해 집에서 죽지

물 같은 점액질의 달팽이는 스스로 짓는 집 한 채 없이

살면서 기와 한 장 올리지 못한 집 뒤집어쓰고

거기 깃들어 살지

더듬어 갈 곳이 어디 극락뿐이랴

그러다 죽으면 바람에 몸 녹이고

살던 집 텅텅 버려두어도

세간은커녕 아무도 깃들지 않아

사람으로 태어나

기어코 한 세상 잘 살자던 불면의 밤이야

차라리 마음조차 팽개치고 떠난 달팽이로

그냥 그렇게 꼬물거리며 살다 가겠네

내가 사는 집이 큰 집이다 작은 집이다 고대광실이다

탐낼 것 하나 없이 어느 날 내 꿈도

저리 맑은 바람 촛농처럼 녹아버렸으면 좋겠네

죽은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

기와 한 장 올리지 못한 집을 뒤집어쓰고서라도

또 그렇게 찬찬히 더듬어 가게 *

 

* 생각했다
살면서는 바람에게서 사리나 수습해
아이들 젖니 같은 시나 몇 편 쓰고
그도 못 잊을 것들 있거든
내 정강이뼈에 묻어둔 토씨나 건져
싸리나무 게송이나 몇 줄 새기고
그러다 가면 좋으리
죽어서는 목련꽃잎 저 촉수에 목덜미 찔려가며
꽃잎에 흐르는 더듬이와 눈짓이나 주고받고
그러면 좋으리
한 세상 해 저문 바위에 기대어
생각한다
아는 체하는 구름 있거든
한들거리는 꽃모가지 되어
흔들어 줘야지
소풍 같은 내 인생

하고 *

 

* 혼자 놀기

너 찾으러 갔더니

너는 없고

돌부처만 혼자 나앉아

해바라기 하고 있었다네

그 돌에 기대

바람과 놀았다네 *

 

* 홍시

부처는 부처하고 놀고

중생은 중생하고 놀고

혼자 있어도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붉은 홍시 하나

겨울 창문틀에 박힌

피멍 하나 * 

 

* 멸치노래  

멸치 가슴에 똥이 있는 것은

제 물에서 놀던 멸치 건져서

비린내 나는 세상에 말려 놓았으니

헛구역질하다

가슴이 타버려서 그런다

 

세상에나!

똥 가슴 발라먹고도

제 가슴은 안 탈까

가슴을 빼앗기고도

가슴 태우지 않는 저 간간함! * 

 

* 봄에게서
자글자글 게 눈 끓듯 찻물을 식혀
다관에 넣고 봄날을 우린다
봄날을 우리면 무슨 향이 날까
말하자면 봄날은 저절로 잘 우려진 차 맛이다
봄비 오는 소리로 졸졸 흐르지
찻잎 머금은 입술로 새 울지
배냇 아이 손사래로 벙그는 꽃에게서 봄을 건진다
매화꽃 피는 봄에게서는 벌써 우전 맛이 나는데
누가 먼저 봄을 덖어 소식 전할까 *

 

* 달 
제 안에 홀로 달 뜨더란다
하도 크고 벅차서
그 달 품고
그래 울었더란다
아 나를 끌어당기는
저 애욕의 끄나풀
어찌하여 그대 안의 줄 팽팽히 뽑아
내 촉수의 간극에 꽂아놓고
파르르 떨고 있느냐
미안하다
그러고도 멀리
단칼에 끊지 못하는 흔들림아
미안하다
놓을 것도 없이 당길 것도 없이
그대 안에 둥실
달로 떠서 미안하다 *


* 빈 집
끝났네
지난겨울 그렇게도 춥더니
이제야 꽃샘바람 녹고 봄비 온다네
아 누가 저 비 맞고 와서
불 없는 방 바람벽에 녹슨 마음을 거실라나
오래도록 앉아서 꿈 꾸실라나
촛농 사그라진 새벽에라도 환하게
별빛 총총 깨어 있을라나
북어국 없이도 고봉밥 없이도
내내 따뜻하실라나 *

* 그대를 잃는다
새처럼 울지도 않네
달처럼 뜨지도 않네
그대처럼 그리워하지도 않네
한낱 적막이 내 관자놀이에 접신 해 들어와서는
그 아래, 늙은 무우수無憂樹 나무 아래
마음을 당겨 쩔쩔 끓는 해금소리로 앓고 있네
이제는 오고 감에 속지 않으리
그대 온들 쪽배 숨겨들 일도 없으리
가며가며 목마르지 마시라고
묵은 소금이나 챙겨주리
바람 속에 강물이나 느리게 풀어놓고
뱃전을 치는 물소리나 찰박찰박 들으면서
속절없이 그렇게 흘러가시게 *

 

* 앉으라, 고요

가야하리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벌레처럼 몸 구부리고

엎드려야 하리

일주문 지나 이마를 씻는

나무에게도 안부하고
나에게 너에게
 
바람에게 꽃에게
절해야 하리
절 속에는
위도 없이 아래도 없이
    

흰 고요가 사는데

내 안의 씨방에 홀로 앉으면

법랍 많은 동백나무가

허리를 비틀며 춤을 추리

꽃술 같은 별빛들이 

꽃 창살에 눈 깜박이면

풍경소리 꿈결처럼 잠겨오리

그대 또한 금빛 빰을 가진

부처가 되리 *

 

* 흘러라 꽃그림자

그립거든 이렇게 해

잔을 두 개 놓고

지나는 것이 바람 같으면 바람을 담아서

강물 같으면 강물을 담아서

나 한 잔 그대도 한 잔

천불전 댓돌 아래 푸른 돌꽃들

좌복에 눌어붙은 수좌처럼 앉았거든

하늘에 걸린 풍경이 새벽을 깨우고

그 새벽 몸에 적신 천 년 된 지붕

기와 깨지는 소리가

이제 막 한 소식 하는 소리로 들리거든

위하여 나 한잔 그대도 한 잔

때로는 속절없음도 맑아

범종각 시리게 덮인 눈이 녹아 뚝뚝

떠나온 날 빗방울같이 떨어지거든

그대 눈 길 박힌 산천도 한 잔

그대 애타는 꽃 그림자도 한 잔

안개 이는 골짜기 쓰린 새벽도 한 잔

그러다 동굴처럼 쓰러지는 아침 

밝아오는 해를 계란 노른자 삼아

나 한 잔 그대도 한 잔 *

 

* 그대 처마에  

그 절의 광명전 앞에는

돌꽃 잘 마른 석등이

햇살 아래 뜨겁게 서 있었어요

석등은 무엇으로 세상을 밝히나

석등 속을 들여다보았어요 

석등 안에는 어떤 꽃이 세상을 밝히나

들여다보았어요

기름등잔 하나 없이 세상의 먼지만 날아 앉아

거기 천 년 부스러진 곳에 몸 붙인

돌꽃만 있었어요

마음 없이 세상을 밝힌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요

어느날 내게 피어나는 마음이

꽃처럼 환하면 그때

돌아보면 석등 안에서도

은돌꽃 금돌꽃

그런 돌꽃이 피어나는 것인지

아무 말도 건네주지 않는 빈 꽃이어요

아직 저 석등이 무엇으로 세상을 밝히는지 몰라요

다만 아는 것은

내 마음 환한 것 따라 꽃이 피고

그런 꽃마음 따라 등불도 환하다는 것뿐

마음은 스스로 피어나는

꽃이라는 것뿐

그대 사는 처마에 달아드리고 싶은

마음등이라는 것뿐 *

 

* 물고기, 거기서 울다  

가끔씩 처마 밑 풍경을 떠나

전생의 바다를 헤엄치듯

청동빛 지느러미 흐느적거리며

떠다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일평생 눈 감고 잠들지 않는

물고기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떠한지

비늘갑옷을 입고 햇빛에 다비되는 것은 어떠한지 

마른 지느러미 부서지도록 흔들며

하늘을 날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녹슨 비늘 촛농처럼 떨구며

어느 하늘에서 환속했는지 모르게

그렇게 하늘이 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울 것입니다

빛 바랜 단청의 육송 서까래에서

만다라 피는

거기 목탁소리 맑고

환속한 새들 한 발톱 깃들지 않는

풍경 속 쨍그랑 소리일랑

그리울 것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풍경소리로 우는 것은

하늘을 날고 싶기 때문입니다 *

 

* 잘 되었다   

이 가을 햇빛은

 

꼭 잘 깎은 목탁 같다

그때 떠난 것이

잘 되었다

참 잘 되었다

가을이 내 안에서

얼굴 붉히며

익어갈 수 있으니

가만 두어도 

내가 내 안에서

단풍들 수 있으니

산 빛 보며 혼잣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

 

* 폭설  

가끔씩은 저렇게

성난 눈발이었으면 좋겠다

미친 듯이 울다가도

잠깐 햇빛에 흰 이빨처럼

차갑게 반짝이며 웃어 봤으면

좋겠다 가끔씩은 저렇게

겨울 풀꽃이며 사람들의 집

어둔 곳의 캄캄함

우리들의 등 시린 사랑까지도

아주 덮어버렸으면 좋겠다

잠에서 풀린 산기슭 짐승처럼

톡톡 얼음장 깨며

겨울 가뭄 속의

저 지독한 보리 싹처럼 씩씩하게

살아날 것만 살아나고

돋아날 것만 돋아나는

그런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

 

* 불각사(佛刻寺)의 밤  

눈 오네

좋네

추와도 겁나 좋네

누가 저 눈 길 더듬어

차 먹으러 오면

눈발 아래

 

좋겠네 

빵모자 쓰고

눈사람처럼 서 있을라네

허공에 찻잔 훈김 쏟으며

언 입으로 반길라네 

 

어눌해도 좋아라

차 먹고 일어나면

짐짓 핑계대고

구들목 뜨신데 자고 가시라

소매 끌어 앉힐라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새처럼

차 향 가시지 않는 찻이파리 같은 손으로

가야돼, 거절하며

실은 눈발 흩날리는 속으로

허위허위 사라지는 뒤태

그 부처 보고자픈 것이지만

 

눈 오네 펄펄 * 

 

* 석여공시집[잘 되었다]-문학의전당

 

* 석여공 스님

-1962년 전남 강진 출생

-2006년 계간 [불교문예] 신인상 수상, 녹두문화상 수상

-승려,와편전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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