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묵은 김치 사설(辭說) - 홍윤숙

효림♡ 2009. 10. 26. 08:04

* 묵은 김치 사설(辭說) -묵은김치독을부시다가문득그것들이탄식하는소리를 들었다 홍윤숙

 

내게도 시퍼렇던 잎이며 줄기

참대같이 푸르던 날들이 있었더니라

그 빳빳하던 사지를 소금에 절이고 절여

인고와 시련의 고춧가루 버무리고

사랑과 눈물의 파 마늘 양념으로 뼈까지 녹여

일생을 마쳤다 타고난 목숨의 이유대로

이제 창창하던 살과 뼈 다 내어주고

몇 가닥 뭉크러진 찌거기 상한 속으로 남아

오물로 버려진다

이로써 한 몫을 완성한다

 

그날 밤 TV화면에서 한 노파를 보았다 아래 윗니 다 빠진 마른 시래기 다발 같은 호호백발 할머니였다 거리구경 나가자는

아들 따라 나왔다가 잠시 기다리라 앉혀 놓고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 집도 절도 까막눈인 노파는 행여 내 자식 다시 올까

기다리며 몇몇 날을 노숙으로 새웠지만 끝내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퀭한 노인의 질척한 눈가엔 한도 설움도 희미하게

바랜 노을로 서리고 살아온 칠십 평생 어느 골짜기를 뒤져 보아도 삭은 뼈 마른 가죽 편히 뉠 땅 위의 집은 없었다

징그러운 오물로 져다버린 쓰레기 한 짐 파먹고 버린 겨울 묵은 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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