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풍장(風葬) - 황동규

효림♡ 2009. 10. 19. 08:29

* 풍장(風葬) 1 -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

* 황동규시집[삶을 살아낸다는 것]-휴먼앤북스

 

* 풍장(風葬) 2 - 유평근에게

아 색깔의 장마비!
바람 속에 판자 휘듯
목이 뒤틀려 퀭하니 눈뜨고 바라보는
저 옷 벗는 색깔들
흙과 담싼 모래 그 너머
바다빛 바다!
그 위에 떠다니는 가을 햇빛의 알갱이들. 

 

소주가 소주에 취해 술의 숨길 되듯
바싹 마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 속에 둥실 떠.....

* 황동규시집[삶을 살아낸다는 것]-휴먼앤북스

 

* 풍장(風葬) 19  

아 번역하고 싶다,   

이 늦가을   

저 허옇게 깔린 갈대 위로   

환히 타고 있는 단풍숲의 색깔을.   

 

생각을 줄줄이 끄집어내   

매듭진 줄 들고 꺼내   

그 위에 얹어   

그냥 태워!

 

* 풍장(風葬) 24
베란다에 함박꽃 필 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친구 하나 죽었다는 편지 쓰고
편지 속에 죽은 친구 욕 좀 쓰려다
대신 함박꽃 피었다는 얘기를 자세히 적었다

밤세수하고 머리 새로 씻으니
달이 막 지고 지구가 떠오른다

* 풍장(風葬) 25
희양산 봉암사에 다가갔다
늦가을 저녁
발목이 깊은 낙엽에 빠지고
시냇물 소리도 낙엽에빠지고
바람 소리까지 낙엽에 빠지는
늦가을 저녁

걸음 멈추면
소리내던 모든 것의 소리 소멸
움직이던 모든 것의 기척 소멸
문득 얼굴 들면
하얗게 타는 희양산 봉우리
소리없이 환한

주위엔 저 옥보라색
빛들이 몸 가벼운 쪽으로 쏠리다 맑아져
分光 그만두고 스펙트럼 벗어나 우주 속에 사라졌다가
지구의 하늘이 그리워 돌아온
저 색!

때맞춰 하얗게 타는 산봉우리 

 

* 풍장(風葬) 27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

* 황동규시집[삶을 살아낸다는 것]-휴먼앤북스

 

* 풍장(風葬) 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답답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 볼 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 보며

한 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 풍장(風葬) 31
마른 국화를 비벼서
향내를 낸다
꽃의 체취가 그토록 가벼울 수 있을지
손바닥을 들여다 보다가
마음이 쏟아진다

나비나 하루살이 몸에
식물의 마음 심은 가벼운 것이 되어
떠돌리라
비벼진 꽃 냄새 살짝 띠고

 

* 풍장(風葬) 32

가을날

풀잎의 한 가닥으로

사근사근 말라

몸의 냄새를 조금 갈고

바삭바삭 소리로

줄기와 뿌리에 남몰래 하직을 하고

쌍사발 시계가 눈망울을 구울리며

빨간 꼬리들을 달고 날아다니는 공간 속으로

잠자리채 높이 쳐든 소년이 되어 들어가리.  

 

* 풍장(風葬) 35

친구 사진 앞에서 두 번 절을 한다.

친구 사진이 웃는다,

달라진 게 없다고.

몸 속 원자들 서로 자리 좀 바꿨을 뿐,

영안실 밖에 내리는 저 빗소리도

옆방에서 술 마시고 화투치는 조객들의 소리도

화장실 가기 위해 슬리퍼 끄는 소리까지도

다 그래도 있다고.

 

* 풍장(風葬) 36 

내 마지막 기쁨은

시(詩)의 액설레이터 밟고 또 밟아

시계(視界) 좁아질 만큼 내리밟아

한 무리 환한 참단풍에 눈이 열려

벨트 맨 채 한계령 절벽 너머로

환한 다이빙.

몸과 허공 0밀리 간격의 만남.

 

아 내 눈!

 

속에서 타는

단풍.

 

* 풍장(風葬) 40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
피부로 마시고
내장(內臟)으로 마시고
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
진짜 꿀벌들을 만났다

벌들이 별안간 공중에 떠서
배들을 내밀고 웃었다.
벌들의 배들이 하나씩 뒤집히며
매화의 내장으로 피어……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가?

 

* 풍장(風葬) 64 

밤에 자다 홀연히 깨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거실에 나가 벽 더듬어 불을 켜고

냉수 한잔 마시고

공연히 달력 한번 쳐다보고

말 않으면 모든 말 금시 말라버릴 듯

불 끄려다 석곡란에 물 주며

몇 마디 말 중얼거리다 말고.

 

언제부터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인간의 뒷모습.

 

* 풍장(風葬) 70
냇물 위로 뻗은 마른 나뭇가지 끝
저녁 햇빛 속에
조그만 물새 하나 앉아 있다
수척한 물새 하나
생각에 잠겼는가
냇물을 굽어보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
조으는가

조으는가
꿈도 없이 *

* 황동규시집[삶을 살아낸다는 것]-휴먼앤북스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월의 나팔꽃 - 김점희  (0) 2009.10.24
가을 아침에 - 김소월  (0) 2009.10.24
상자속에 숨기고 싶은 그리움 - 한용운  (0) 2009.10.16
낙엽 - 윌리엄 B. 예이츠  (0) 2009.09.30
달맞이꽃 - 김종섭  (0) 2009.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