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아침에 - 김소월
아득한 퍼스레한 하늘 아래서
회색(灰色)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섶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쌓여 오는 모든 기억(記憶)은
피 흘린 상처(傷處)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靈)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속이 가비얍던 날
그리운 그 한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
* 가을 저녁에 - 김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 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言約)도 없건마는!
기다려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
* 김소월시집[진달래꽃]-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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