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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 - 최영미

효림♡ 2009. 11. 23. 08:15

* 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 - 최영미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겨울이 가을을 덮친다

 

울긋불긋

위에

끗희끗

 

층층이 무너지는 소리도 없이

죽음이 삶의 마지막 몸부림 위에 내려앉는 아침

 

네가 지키려 한 여름이, 가을이,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내일이면 더 순수해질 단풍의 붉은 피를 위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첫눈이 쌓인다 *

* 최영미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 혼자라는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

* 최영미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

* 최영미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 나는 시를 쓴다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혀를 깨무는 아픔 없이 

무서운 폭풍을 잠재우려

 

봄꽃의 향기를 가을에 음미하려 

잿더미에서 불씨를 찾으려

 

저녁놀을 너와 함께 마시기 위해 

싱싱한 고기의 피로 더렵혀진 입술을 닦기 위해

 

젊은날의 지저분한 낙서들을 치우고 

깨끗해질 책상서랍을 위해

 

안전하게 미치기 위해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 복수하기 위해

 

치명적인 시간들을 괄호 안에 숨기는 재미에 

부끄러움을 감추려, 詩를 저지른다 *

 

*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

* 최영미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 사는 이유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 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 최영미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 詩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 문장으로 뚝 떨어지는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리고 구리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채이면
쩔렁! 하고 가끔씩 소리내어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

* 최영미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 사랑의 정원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오래 오래 고독한 여름을 보내고
거짓 꽃들이 시든 뒤에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


아, 그러나 거짓 꽃들이 시들 때
진짜 꽃도 시들어버려


어느새 까맣게 타들어 간 마지막 여름 장미
기다리다 바스라진 입술들.


널 위해 남겨진 철 지난 유행가 하나
하늘 높이 사라진다

* 글로리라 반데빌트(Gloria Vanderbilt)의 시 [Love Comes Slowly]의 일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