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달의 몰락 - 유하

효림♡ 2009. 11. 23. 08:24

* 느린 달팽이의 사랑 - 유하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
 

 

 

* 흐르는 강물처럼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아무에게도 다가가지 않고 오직 자기 내부로의 산책으로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힘만으로
생명의 산소를 만들고 서로의 잎새를 키운다네
친구여, 그대가 혼자 걸었던 날의 흐르는 강물을
부디 잊지 말길 바라네
서로를 주장하지도 다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의 흐름처럼
그대도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스며드는 곳에서 삶의 심연을 얻을 거라 믿고 있네
그렇게 한 인생의 바다에 당도하리라
나는 믿고 있네 *

 

* 농담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미안해 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데 이건 진실이에요 *

 

* 사랑의 지옥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

 

*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나 그때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우우거렸네
욕정이 없었다면 생도 없었으리
수음 아니면 절망이겠지,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가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네

교과서 갈피에 숨겨 놓은 빨간책, 육체의 악마와
사랑에 빠졌지, 각종 공인된 진리는 발가벗은 나신
그 캄캄한 허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 모든 선의 경전이 끝나는 곳에서 악마처럼
착해지고 싶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짓이란 고작
이 세계의 좁은 지하실 속에서 안간힘으로 죽음을 유희하는 것,
내일을 향한 설렘이여, 우우
무덤은 너를 군것질하며 줄기차게 삶을 기다리네

내 청춘의 레지스탕스, 지상 위의 난
햇살에 의해 남김없이 저격되었지
세상의 열병이 내 몸 속에 들어와 불을 밝혔네
금지된 생生의 집어등이여, 지하의 모든 나를 불러내 다오
나는 사유의 야바위꾼, 구멍 난 영혼, 흠집 가득한 기억의 육체들을
별빛의 찬란함으로 팔아먹는다네
내 마음의 지하상가는 여전히 승냥이 울음으로 붐비고
나 끝끝내 목이 쉰 야외 전축처럼
해적을 노래부르고 해적의 애꾸눈으로 사랑하리 *

 

* 연애 편지

공부는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쿵푸입니다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이연걸이가 심신 합일의 경지에서 무공에 정진하듯,

몸과 마음을 함께 연마한다는 뜻이겠지요

공부 시간에, 그것도 국어 시간에
나는 자주 졸았습니다
이를테면, 교과서의 시가
정작 시를 멀리하게 만들었던 시절이었죠
물론 졸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옆 학교 여학생이 보낸 편지를 읽던 날이었습니다
연인이란 말을 생각하면
들킨 새처럼 가슴이 떨려요.....
나는 그 편지의 행간 행간에 심신의 전부를 다 던져
그녀의 떨림에 감춰진 말들을 읽어내려 애썼지요 
그나마 그 짧은 글 읽기도 선생에게 들켜

조각 조각 찢기고 말았지만

그 후로도 눈으로 쫓아가는 독서는

공부 시간의 쏟아지던 졸음처럼 많았지만,

내 지금 학교로부터 멀리 떠나온 눈으로

학교 담장 안의 삶들을 아련히 바라보니

선생의 시선 밖에서, 온 몸과 마음을 다 던져

풋사랑의 편지를 읽던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유일한 쿵푸였어요 *

 

* 달의 몰락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 아래
집안 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씨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밖으로 나간다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 없음을 사랑한다
그 쓸모 없음에 대한 사랑이 나를 시 쓰게 한다
그러므로 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호의보다는
날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냉랭한 매혹에게 운명을 걸었다
나를 악착같이 포용해내려는 집 밖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온 우주의 문밖에서 난 유일하게 달과 마주한다
유목민인 달의 얼굴에 난 내 운명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만
달은 그저 냉랭한 매혹만을 보여줄 뿐이다
난 일탈의 고독으로, 달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쓴다
그렇게 내 인생의 대부분은 달을 노래하는 데 바쳐질 것이다

달이 몰락한다 난 이미, 달이 몰락한 그곳에서
둥근 달을 바라본 자이다
달이 몰락한다, 그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내 노래도 달과 더불어 몰락해갈 것이다 *
 

* 유하시집[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