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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 정일근

효림♡ 2009. 11. 30. 08:14

*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 정일근  

 

* 제 1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 제 2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우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四宣齊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도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

 

* 정일근시집[바다가 보이는 교실]-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