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송수권 시 모음

효림♡ 2010. 1. 25. 08:13

*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 젊은 날의 초상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나누는 사람은 행복하다 

더 주고 싶어도 끝내 

더 줄 것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도 젊은 

날을 헤매인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밤의 고통 끝에 폭설로 지는 겨울밤을 

그대 창문의 불빛을 떠나지 못하는  

한 사내의 그림자는 행복하다 

그대 가슴속에 영원히 무덤을 파고 간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아, 젊은 날의 고뇌여 방황이여 * 

 

* 갯메꽃  

채석강에 와서 세월따라 살며
좋은 그리움 하나는 늘 숨겨놓고 살지
수평선 위에 눈썹같이 걸리는 희미한 낮달 하나
어느 날은 떴다 지다 말다가
이승의 꿈 속에서 피었다 지듯이
평생 사무친 그리움 하나는
바람 파도 끝머리 숨겨놓고 살지

때로는 모래밭에 나와
네 이름 목터지게 부르다
빼마른 줄기 끝 갯메꽃 한 송이로 피어
딸랑딸랑 서러운 종 줄을 흔들기도 하지

어느 날 빈 자리
너도 와서 한번 목터지게 불러 봐
내가 꾸다꾸다 못 다 꾼 꿈
이 바닷가 썩돌 밑을 파 봐
거기 해묵은 얼레달 하나 들어 있을 거야
부디 너도 좋은 그리움 하나
거기 묻어놓고 가기를.....

 

* 홍탁  

지금은 목포 삼합을 남도 삼합이라고 부른다

 

두엄 속에 삭힌 홍어와 해묵은 배추김치

그리고 돼지고기 편육

 

여기에 탁배기 한 잔을 곁들면

홍탁

 

이른 봄 무논에 물넘듯

어, 칼칼한 황새 목에 술 들어가네.

 

아그들아, 술 체엔 약도 없단다

거, 조심들 하거라 잉!

 

지금은 목포 삼합을 남도 삽합이라고 부른다 * 

* 송수권시집[우리나라의 숲과 새들]-고요아침

 

* 까치밥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등 따숩게 비춰주고 있지 않으냐

 

* 적막한 바닷가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

* 송수권시집[적막한 바닷가]-한국문연

 
* 뻘물
이 질퍽한 뻘 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 냄새 그보다는 뭉클한
이 질퍽한 뻘 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이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구 소리보단
땅을 메다치는 징 소리가 좋아요

하늘로는 가지 마.....
하늘로는 가지 마.....
캄캄하게 저물며 뒤늦게 오는 땅 울음
그 징소리가 좋아요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 가고
저승까진 죽어 갔다가
밤길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가 좋아요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천고에 몇 번쯤 학이 비껴 날았을 듯한
저 능선들,
날아가다 지쳐 스러졌을 그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
오늘은 시끄럽게 시끄럽게 그 능선들의 떼 울음이
창해에 끓어 넘친다.

만상이 잠드는 황혼의 고요 속에
어디로 가는지 저희들끼리 시끄럽게 난다.

浮石寺 무량수전 한 채가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의 노을 빛을 되받아 연꽃처럼 활짝 벌고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善妙 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장엄하다
어둠 속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하는 것

마침내 태백과 소맥, 兩白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쓰러진다. *
 

* 봄

언제나 내 꿈꾸는 봄을
서문리 네거리
그 비각거리 한 귀퉁이에서 철판을 두들기는
대장간의 즐거운 망치소리 속에
숨어 있다

 

무싯날에도 마부들이 줄을 이었다
말은 길마 벗고 마부는 굽을 쳐들고
대장간 영감은 말발굽에 편자를 붙여가며
못을 쳐댔다

 

말은 네 굽 땅에 박고
하늘 높이 갈기를 흔들며 울었다
그 화덕에서 어두운 하늘에 퍼붓던 불꽃
그 시절에 빛났던 우리들의 연애와 추수와 노동

 

지금도 그 골짜기의 깊은 숲
캄캄한 못물 속을 들여다보면
처릉처릉 울릴 듯한
겨울산 뻐꾸기 소리......

 

집집마다 고드름 발은 풀어지고
새로 짓는 낙숫물 소리
산들은 느리게 트림을 하며 깨어나서
봉황산 기슭에 먼저 봄이 왔다

 

* 대숲 바람소리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하게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댓이파리의 맑은 숨소리 * 

 

* 석남꽃 꺾어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들고

밤이슬 풀비린내 옷자락 적시어가며

네 집에 들리라

 

봄비는 즐겁다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분홍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소리가 들려온다
향긋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몰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 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뒷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 나팔꽃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 내사랑은  

저 산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

저 아랫뜸 강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

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

하구쪽 배밭의 배꽃도 지라고 해라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소니

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정작 이 봄은 뺨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저 양지쪽 감나무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

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는 때문

연초록 움들처럼 차 오르면서, 햇빛에도 부끄러우면서

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

그와 같이 뺨 부비는 것, 소근거리는 것,

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 

 

* 비가
어느날 세상은 비에 얼룩지고
내 마음 서러운 날은 풀밭을 찾아갔다
뿌옇게 흐르는 안개비를 옷소매로 닦으며
짓무른 황토흙을 지쳐 나가 풀밭을 걸었다
구둣발 밑에서 깨어지는 풀들의 비명
어떤 풀꽃들은 안개속에서 팔굽이를 들어 필사적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무심히 고개를 돌렸을 때 등뒤로 거대하게 찍혀진 발자국들
황토흙 발자국들, 흐르는 옷소매고 나도 몇번이나 얼굴을 지웠다
풀들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 아침 강
누이야, 동트는 우리 새벽 강물
너는 따라가 보았는가
수런수런 큰 기침하며 강가에 나와
우리 산들 얼굴 씻는 것
어떤 산은 한 모금 물 마시고 쿠렁쿠렁
양치질하는 것
어떤 산은 밤새도록 발을 절고 내려와
발바닥 티눈을 핥는 것
누이야, 너는 그런 동트는 새벽 강물
따라가 보았는가
물총새 한 마리가 담청색 날개를 털어
저 혼자 반도의 아침을 깨우는 것
반짝, 뜨는 은피라미 떼 몰아다 벼랑 끝 감춘
제 새끼들에게 아침 밥상 차리는 것
그 벼랑 끝 삼존마애불 은은한 미소 감도는 것
그 반도의 아침 강을 따라가 보았는가 *
* 송수권시집[시골길 또는 술통]-종려나무

 

* 지리산 뻐꾹새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 냈다

 

智異山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가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가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智異山中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 

 
시골길 또는 술통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 미루나무 끝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이 세상 질펀한 노름판은 어데 있더냐

네가 깜박 취해 깨어나지 못할

그런 웃음판은 어데 있더냐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네가 걸어온 길은 삶도 사랑도 자유도

고독한 쓸개들뿐이 아니었더냐고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믿음도 맹서도 저 길바닥에 잠시 뉘어놓고

이리 와봐 이리 와봐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흰 배때아리를 뒤채는 속잎새들이나 널어놓고

낯간지러운 서정시로 흥타령이나 읊으며

우리들처럼 어깨춤이나 추며 깨끼춤이나 추며

이 강산 좋은 한철을 너는 무심히 지나갈 거냐고

미루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 송수권시집[시골길 또는 술통]-종려나무 

 

* 송수권(宋秀權)시인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문학사상 [山門에 기대어]당선, 소월시문학상, 1999년정지용문학상, 2003 영랑시문학상, 김달진 문학상 수상

-시집 [山門에 기대어][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파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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