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세한도(歲寒圖) 시 모음

효림♡ 2010. 1. 19. 08:32

세한도(歲寒圖) - 신현정

눈 펄펄 날리는 오늘은 내 나귀를 구해

그걸 타고 그 집에 들르리라
그 집 가게 되면
일필휘지(一筆揮之), 뻗치고 휘어지고 창창히 뻗은 소나무 아래
지붕 낮게 해서 엎드린 그 집 주위를
한 열 번은 더 돌게 되리라
우선 당호(堂戶)에 들기 전 헛기침을 해보고
그리고는 내 타고 간 나귀를 살그머니 소나무 기둥에
비끌어 매놓고는
그리고는 냅다 눈발 속으로 줄행랑을 치리라 하는 것이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적소(謫所) - 신현정
나, 세한도(歲寒圖) 속으로 들어갔지 뭡니까
들어가서는 하늘 한복판에다 손 훠이훠이 저어
거기 점 찍혀 있는 갈필(渴筆)의 기러기들 날아가게 하고
그리고는 그리고는 눈 와서 지붕 낮은 거 더 낮아진
저 먹 같은 집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아, 그만 품에 품고 간 청주 한 병을 내가 다 마셔버렸지 뭡니까
빈 술병은 바람 부는 한 귀퉁이에 똑바로 세워놓고
그러고는 그러고는 소나무 네 그루에 각각 추운 절 하고는
도로 나왔습니다만 이거야 참 또 결례했습니다 *


* 세한도 가는 길 - 유안진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고개부터는 추사체(秋史體)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

 

* 세한도 - 박현수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瘀血)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크러진 삶을 쓸어올리며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血竹)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을까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鶴笛)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는 것 *

*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 세한도 - 유자효

뼈가 시리다
넋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도의 위리안치
찾는 사람 없으니 고여 있고
흐르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간
원수 같은 사람이 그립다
누굴 미워라도 해야 살겠다
무얼 찾아 냈는지
까마귀 한 쌍이 진종일 울어
금부도사 행차가 당도할지 모르겠다
삶은 어차피
한바탕 꿈이라고 치부해도
귓가에 스치는 금관조복의 쓸림 소리
아내의 보드라운 살결 내음새
아이들의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끝내 잊히지 않는 지독한 형벌
무슨 겨울이 눈도 없는가
내일 없는 적소에
무릎 꿇고 앉으니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나
질긴 목숨의 끈
소나무는 추위에 더욱 푸르니
붓을 들어 허망한 꿈을 그린다 *
* 제17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

 

세한도 - 김선태  

비틀비틀 따라온 길이 하나 가파르게 집에 닿는다 
외모진 바다 기슭, 집은 갯고등처럼 엎드려 있다
바다에는 무겁게 팔짱을 낀 섬들 여럿 떠 있고 
날마다 황혼은 외론 마음을 불태우며 떨어진다

 

솔가지 꺾어 아궁이 불 지필 때 나는 저녁연기 
저 혼자 눈물겹다, 꺼질 듯한 등불을 내건 집 
방바닥처럼 차디차다, 이불 한 장에 덮은 마음 
거기 공복의 쓰린 희망 하나 단정하게 누워 있다

 

유리창 너머로 또 밤이 페인트처럼 흘러내린다 
돌연 어제와 오늘의 풍경을 지우는 어둠은 고맙다 
불을 끄고 마음도 끄니 세상이 한없이 넉넉하다 
밤새 파도가 물어뜯는지 바다 기슭이 온통 아프다

 

지극하구나,  과거를 사납게 읽고 가는 저 바람소리 
여기, 여기까지 와서야 나는 세상을 다시 본다 
어둠 한 장 위에 오체투지로 시를 지우고 시를 쓴다 
유리창에 성에꽃 만발하다

 

* 세한도 - 정호승

영등포역 어느 뒷골목에서 봤다고 하고
청량리역 어느 무료급식소에서 봤다고 하는
아버지를 찾아 한겨울 내내
서울을 떠돌다가
동부시립병원 행려병동으로 실려가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 행려병자들을 보고 돌아와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청정히 눈을 맞고 서 있는
아버지의 텅 빈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다
바람은 차고 달은 춥다
솔가지에 내린 눈은 더이상 아무 데도 내릴 데가 없다
젊은 날 모내기를 끝내고 찍은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 옆에 걸려 있는 
세한도 속으로
새 한마리 날아와 앉아 춥다 *

 

* 세한도 - 도종환

소한이 가까워지자 눈이 내리고 날이 추워져
그대 말대로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은 더욱 빛난다
나도 그대처럼 꺾인 나무보다 꼿꼿한
어린 나무에 더 유정한 마음을 품어
가지를 매만지며 눈을 털어낸다
이미 많은 새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난 지 오래인데
잔가지로 성글게 엮은 집에서 내려오는 텃새들은
눈 속에서 어떻게 찬 밤을 지샜을까
떠나지 못한 새들의 울음소리에 깨어
어깨를 털고 서 있는 버즘나무 백양나무
열매를 많이 달고 서 있던 까닭에
허리에 무수리 돌을 맞은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소나무 잣나무에 가려 똑같이 푸른 빛을 잃지 않았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측백나무
폭설에 덮인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은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발 아래 밟히며 부서지는 눈과 얼음처럼
그동안 우리가 쌓은 것들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대륙을 건너와 눈을 몰아다 뿌리는
냉혹한 비음의 바람소리
언제쯤 그칠 것인지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기나긴 유배에서 퓰려나 돌아가던 길
그대 오만한 손으로 떼어냈던
편액의 글씨를 끄덕이며 다시 걸었듯
나도 이 버림받은 세월이 끝나게 되면
내 손으로 떼어냈던 것들을 다시 걸리라
한계단 내려서서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그대 이름을 불러보리라
이 싸늘한 세월 천지를 덮은 눈 속에서
녹다가 얼어붙어 빙판이 되어버린 숲길에서 *

* 도종환시집[부드러운 직선]-창비

 

* 세한도 - 송수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

 

* 세한도 - 정희성

1. 송(松)―완당(阮堂)의 그림을 그리며

참솔가지 몇 개로 견디고 있다

완당이여

붓까지 얼었던가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추위가 이 속에도 있고

누구나 마른 소나무 한 그루로

이 겨울을 서 있어야 한다

 

2. 죽(竹) 

참대 한줄기
수식어도 사양했다
겨울이여 생각할수록
주어는 외롭고
아아, 외쳐 불러
느낌표가 되어 있다 *

 

* 세한도운(歲寒圖韻) - 박희진

소나무 두 그루와 잣나무 두 그루에

덩그렁 집 한 칸

그밖엔 아무 것도 보이지 많는 속에

역력히 어려 있는 추사(秋史)의 신운(神韻)

 

권세에 아부하고

이익에 나부끼는 풍진세상의
엎치락뒤치락도
절해(絶海)의 고도, 이곳에는 못 미친다

일년이 하루같은 추사(秋史)의 귀양살이
겨울의 매서움도
그의 가슴 안에서는 봄바람 일게 하고
시들 수 없는 기개를 드높일 뿐

추운 겨울에
소나무와 잣나무는 돋보이듯이
도저한 가난에
오히려 가멸[富〕이 깃들이듯이

 

보기만 해도 마음 훈훈해지는
옷깃이 여며지는 추사(秋史)의 얼굴
군살이라고는 한 군데도 안 남았다
머리카락도 모조리 빠졌건만

백설의 나룻에
칠같이 빛나는 두 눈을 보라
조선의 빼어난 산수(山水)의 정기가
그에게 모여 광채(光彩)를 내는구나

소나무 두 그루와 잣나무 두 그루에
덩그렁 집 한 칸
그밖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속에
역력히 어려 있는 추사(秋史)의 신운(神韻) *

 

* 세한도 - 오세영

그대가 기다리는 건
청맹과니
그대가 기다리는 건
박수 무당
빈 사립 문밖엔 눈 내리는데
발바닥이여, 발바닥이여, 발바닥이여

그대가 그리는 건
길 잃은 두견
물감으로 눈 그리면
날개를 치고
世寒圖 노송 가지 별빛에 떤다
눈구녕이여, 눈구녕이여, 눈구녕이여

깊은 밤 새록새록 녹는 삼경에
차 달여 마른 입술 적시는 것은
애증의 등잔불 심지 낮추어
외로움 지키려는 심사이어니

그대가 부는 건
깨진 옥피리
달빛 아래 불면
기침이 나고
갈대숲 서걱이는 찬바람소리
콕구멍이여, 콧구멍이여, 콧구멍이여

 

* 세한도 - 고재종

날로 기우듬해 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아픔으로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내는 댓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켜고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다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

까막까치 얼어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

 

* 세한도 - 조정권  

나의 집은 앓아누운 집
잎과 가지가 좋은 나무
하늘을 보며 생각하는 방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큰 방
나의 집은 집주인이 눈구경 나가고
바람만 한가로이 마당을 쓸고 있다 *

 

* 세한도 - 곽재구

수돗물도 숨차 못 오르는 고지대의 전세방을
칠년씩이나 명아주풀 몇 포기와 함께 흔들려온
풀내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나는 또 쓰고 싶다
방안까지 고드름이 쩌렁대는 경신년 혹한
가게의 덧눈에도 북풍에도 송이눈이 쌓이는데
고향에서 부쳐온 칡뿌리를 옹기다로에 끓이며
아내는 또 이 겨울의 남은 슬픔을
뜨개질하고 있을 것이다
은색으로 죽어 있는 서울의 모든 슬픔들을 위하여
예식조차 못 올린 반도의 많은 그리움을 위하여
밤늦게 등을 켜고
한 마리의 들사슴이나
고사리의 새순이라도 새길 것이다 *
 

 

* 세한도(歲寒圖)-벼루 읽기 - 이근배 

1

바람이 세다

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

몸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

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

유채물감으로 번지는

해묵은 슬픔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

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

가시울타리의 세월이

저만치서 쓰러진다

바다가 불을 켠다

 

노인은 눈을 뜬다 

낙뢰(落雷)처럼 타버린 빈 몸 

한 자루의 붓이 되어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

큰선비의 높은 꾸짖음을 

산인들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

나무들이 일어서고

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

다 받아낼 수 없는

귀를 밝히는 소리가

빛으로 끓어 넘친다

노인의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다

김정희는 제주도 대정에 유배 가서 세한도를 그렸다 *

* 이근배시집[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문학세계사

 

* 유리 끼운 歲寒圖 - 황지우 

연말 연시, 휴가 떠난 아파트;

우면산 겨울 나뭇가지 밑을

까치가 U字를 그리며 날아다닌다 

베란다가 한 4백 호(?) 새한도 한 점,

유리 끼워 표구해준다

잠시 후 깃털이 떨어지는 액자 안

저 추운 집에 녹차 한 잔 넣어주랴? *

* 황지우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 세한도(歲寒圖)=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추사가 제주도 유배 5년째인 1844년 진귀한 중국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줬다

23.7X1388.95㎝. 국보 180호

초묵(焦墨·짙은 먹물)만을 사용해 한겨울에도 푸른 소나무 잣나무의 고고한 절개를 표현해 문인화의 진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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