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편(名篇) - 복효근
채석장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에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
* 복효근시집[마늘촛불]-애지
* 채석강 - 조정
변산반도를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격포로 가는 길의 책갈피를 열어볼 때가 있다
뽕짝 메들리 왁자한 리어카에 기대어
서산서 온 노파는
고동 살 받아먹으며 시부렁거렸다
앞 절만 부르소 앞 절만 부르소
청 좋은 내 아들 부르게 뒷절은 냉개 두소
맥없이 부러진 이쑤시개를 주워들고
소금 한 주먹 삼키듯
개심사 명부전 주춧돌이 실하다고 했다
페이지가 낱낱이 암전인 바위를 옆으로 걸어가던
어린 게가
없는 강을 비추는 낮달의 이마에 손을 얹으면
황도십이궁 들고나는
그리움이 칼 맞은 자리처럼 읽힐 때가 있다 *
너는 서해 뻘을 적시는 노을 속에
서본 적이 있는가
망망 뻘밭 속을 헤집고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한 쪽 귀로는 내소사의 범종 소리를 듣고
한 쪽 귀로는 선운사의 쇠북 소리를 듣는다
만 권의 책을 쌓아 올렸다는 채석강 절벽
파도는 다시 그 만 권의 책을 풀어흘려
뻘밭 위에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이곳에서 황혼이야말로 대역사(大役事)를 이루는 시간
가슴 뜨거운 불꽃을 사방으로 던져
내소사 대웅보전의 넉살문 연꽃 몇 송이도 활짝 만개한다
회나무 가지를 치고 오르는 청동까치 한 마리도
만다라와 같은 불립문자로 탄다
곰소의 뻘강을 건너 소금을 져나르다 머슴 등허리가 되었다는
저 소요산 질마재도 마지막 술빛으로 익는다
쉬어라 쉬어라 잠시 잠깐
해는 수평선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
* 바다책, 다시 채석강 -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
* 채석강 반달 - 한광구
하늘의 주인인 해가
바다와 내통하러 내려와
붉게 타오르더니 이내
파도
내려앉으며
층층이 굳어지는
바위
어둠이 깊어지는 바다에
칭얼거리는 울음소리로
반달
떠올라 어쩔 거시어
아으, 얼얼럴럴 어쩔 거싱게
밤새도록 검은 파도위에
은빛 육자배기 가락을 펼쳐놓네 *
* 採石江까지 걸어가면서 - 황지우
二月, 萊蘇寺 內景에 들어서야 나는 문득 還俗詩人 高銀氏를 생각했다
그는 혹시, 入寂해 버린 것이 아닐까? 採石江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내내 그 생각이다
二月, 내 마음속 썰렁한 마당에 들어와 있는 萊蘇寺 百濟塔 一點이 찬물에 깍이어간다
발목이 시리고 살이 아프고 귀가 에이고 그러나 세상은 너무 고요하고 *
* 채석강 - 용혜원
해 저무는 저녁에
채석강을 걸어보았다
바위와 파도가 만나
이루어놓은
태고적 신비가 눈앞에 펼쳐진다
세월이 흘러가며
만들어놓은
그림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솜씨 좋은 석공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들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겹겹히 쌓아놓았으면
이리도 아름다운가
석양이 물드는데
채석강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아름다움을 바다를 향해
가슴이 터지도록 노래하고 싶었다 *
* 용혜원시집[내 마음에 머무는 사람]-나무생각
* 다비식 - 신용목
바위 위에 바위보다 한 발은 더 바다로 나가 석양볕에 늙은 뼈를 태우는 해송을 본다
서해 변산
물 위에
하늘의 다비식
가지 저 끝에서 타올랐으니 그래서 어두웠으니
휘어진 허리 감고 사리 같은 달과 별 더러 나오리
날마다, 그러나 파도 끝 붉게 젖은 때
또 한 줄 바람을 긋고 갈라지는 채석강 *
* 신용목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 채석강 홍합 - 차창룡
다닥다닥다닥다닥.....
십리 밖에서 들려오는 백만 대군의 말발굽소리
다닥다닥 바위를 붙들고 있다
바다의 눈물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폭포처럼 쏟아진다
눈물은 짜고도 달다
이씨부인이 한자 한자 쓴 '법화경'의 글자가
수천억 나유타로 늘어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이야
그것은 소리도 아니요 글자도 아니요
찬 겨울을 견딘 속살은
봄이 오면 참 맛있다 *
* 차창룡시집[고시원은 괜찮아요]-창비
* 채석강, 부서지는 책들 너머에서 - 차창룡
저 수많은 권의 책 중
맨 밑에 있는 한 권을 빼면
저 책들
와르르 무너질 것인가
맨 밑에 있는 책 빼지 않아도
무너지고 있다
책들이여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저 파도를 보아라
부서지는 책들 너머에서
문맹의 할머니가
굴을 딴다
문맹의 할머니가 글자를 읽듯이
굴 껍데기는 입을 벌려
파도를 마신다
저 수만 권의 책
환생하여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쏟아질까
좁쌀 같은 조개들이
집채만한 바위를 붙들고 있다
후박나무숲이 와르르
바다 쪽으로 몰려간다
꾹 눌러 전원을 끈다
나의 앞뒤가 단순하게
물과 뭍으로 바뀌고 있다
따라왔던 국도가 후미등을 켠다
더 나아갈 수 없는 어스름과
다시는 돌아가기 어려운 아침
문자 메세지를 보내려다 만다
채석장 앞에서 기우뚱 미끌어진다
얼마 전부터 낯설어진
생애의 단층이 한쪽으로 기운다
목에 걸려 있던 휴대폰을 들어
파도의 이마를 향해 던진다
늦가을 격포는 제대로 어두워져 있다
땅 끝 여기는 해발 제로
선(線)에서 점으로
내가 먼저 와 있다
천년 저쪽에서 달려온 별빛들이
다시 천년 저쪽으로 달려나간다
격포에서 격포로 망명한다
나의 근황은 이제 나만의 근황이다
내가 먼저 와 있는 것이다 *
* 이문재시집[제국호텔]-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