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가림 시 모음

효림♡ 2010. 4. 14. 08:06

* 석류 -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

 

* 모닥불

한무더기 동백꽃인 양
변두리 눈밭에서 피어나는 것
숨어서 더욱 타오르는 것
강아지도, 구두닦이도, 자전거 수리공도
몸 파는 아가씨도
서로 다투어 꽃송이를 꺾는가
둥그렇게 둥그렇게 어우러져
언 손들을 내뻗고 있구나

노을빛인 양 물든 인간의 고리 *

 

* 황토길 가면  

온 세상 햇빛뿐인
내 고향 황토길 가면
떠나신 님 그리워 그리워라
솔바람 타고 떠나가신 님
아지랭이 아른아른 날 부르는데
정다운 목소리 간 곳 없어라
정다운 목소리 간 곳 없어라

 

온 세상 바람뿐인
내 고향 황토길 가면
푸르른 들 반가워 반가워라
뻐꾸기 홀로 울음 우는 곳
산 메아리 자꾸자꾸 날 부르는데
수줍은 찔레꽃 울듯 하여라
수줍은 찔레꽃 울듯 하여라 *

 

*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 그 여름의 미황사
내리쳐도 내리쳐도
한사코 솟구쳐나오는 머리통을
그 어떤 도끼로도 박살낼 수가 없었나보다
짙푸른 구곡(九曲) 병풍으로 둘러선
산등성이마다
잘생긴 달마들 기웃기웃 서서
동백꽃들 벙근 젖가슴을 보느라
회동그란 눈에
불이 붙어 있었네 
영문 모르고
여름 한문 외우기 공부에 붙들려온
땅강아지 같은 아이들
돌담 너머 뙤약볕에 익어가는 까마중에만
한눈 팔려
생각 사(思)자에 마음(心)이
하나같이 떨어져나가고 없었네 
허허, 달마산이 바로 절간이거늘
미련한 중생들은 무엇하러 빈 법당에서 빌고 있는가
한마디 내뱉고 싶어 죽겠는 건달 나그네
일찌감치 절마당에서 빠져나와
풀숲을 휘젓는데
암여치 한 마리 숫여치를 엎고 나는
그 숨가쁜 활공(滑空)의 순간의 사랑
대낮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네
 

 

* 내 이름은 게(蟹)

한사코 바다에 가 닿으려고

게거품을 물고 오늘과 싸우지만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발목이 빠져들어가는 뻘밭

 

그래도 먼 데서 들려오는 밀물소리

신기루같은 수평선이

보이는 한

이 오체투지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

 

비록 호시탐탐 노리는 어부들의 그물에

꼼짝없이 걸린다 해도

내 이름이 게(蟹)이므로

진흙 바닥에 엎드려 기어가는

이 낮은 포복의 일기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

 

내 발이 남기는 자취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의 시가 결코 아니다

이건 하루의 투쟁 기록

한 치의 틀림없는

눈물겨운 보고서다

 

* 밴댕이를 먹으며  

무게없는 사람을

달아 보고 또 달아 보느라

늘 입속에 말을 우물거리고만 있는

나 같은

반벙어리 보라는 듯

영종도 막배로 온 중년의 사내 하나

깻잎 초고추장에

비릿한 한 움큼의 사랑을 싸서

애인의 입에 듬뿍 쑤셔넣어 준다

하인천 역앞

옛 청관으로 오르는 북성동 언덕길

수원집에서

밴댕이를 먹으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린다

그렇지 그래

사랑은

비릿한 한 움큼의 부끄러움을

남몰래

서로 입에 넣어주는 것이지.....

 

찌르레기의 노래
별빛 초롱한
밤이면
찌르륵 찌르륵 울며
네게로 가고 싶다
그렇게 맨몸으로
몰래 다가가서
내가 네 속에 스며들고
네가 내 속에 스며드는
그림자가 되고 싶다
아슬히 먼 은하수 길
날아가다가
끝내 지옥 바다에 떨어질지라도
한 줄기 무지개 그리움으로 서서
손짓할 수 있다면
黑玉빛 눈물
반짝일 수 있다면
三途내 기슭에 밀리어
허우적거려도 좋으리
별빛 초롱한
밤이면
찌르륵 찌르륵 울며
네게로 가고 싶다

 

* 서울에 온 와불

저 전라도 화순 운주사
만산 계곡의
산등성이에만 누워있기가
너무 답답하고 심심했던지
몰래 야간급행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쳐 온 와불

첫날 밤
종로 3가역 시멘트 바닥에서
시끄러운 행인들의 발짝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신문지 이불을 덮고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잔다

아침 일찍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하아, 여기도 거지
저기도 거지
또 저기도 거지
밤새
곤한 참선에 들었던 자들이
널려있다

운주사 와불이 기가 막혀
"내가 한발 늦었구만....." 하며
긴 한숨을 내쉬는데
아직 덜 깬 술기운의
거뭇한 턱수염 와불이
어깨를 툭 치며
"늦긴 뭐가 늦었다는 거야,
쓸데없이 구시렁대지 말고
아침 공양이나 얻어먹을 생각해" 하고
이 바닥 터줏대감인 양
퉁명스레 내뱉는다

먼저 깔고 앉는 놈이
그 자리의 주인인 걸
새삼 깨달은
운주사 와불
오늘부터는 누워 있기만 할 수 없는
괜히 서울로 올라 온
운주사 와불

 

* 미륵이여, 미래불이여 ―금산사 미륵전에 부쳐  
아홉 살 적
까까머리 동승(童僧)인 양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환한 봄 꽃보라 마구 흩날리던
금산사 마당에 들어섰을 때
모악산 등성이에다 대고 꾸벅 절을 했을 뿐
미륵 할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난 도무지 찾을 수 없었네

1층 대자보전(大慈寶殿)보다
2층 용화지회(龍華之會)보다
3층 미륵전(彌勒殿)보다
키가 큰 미륵보살의 모습

 

얼마나 마음의 귀를 씻고 씻어야
저 강물 같은 숨결을
엿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마음의 거울을 닦고 닦아야
저 연꽃 같은 미소를
비출 수 있을까
얼마나 마음의 문을 열고 열어야
저 바위 같은 침묵의 말씀을
깨칠 수 있을까

토끼는 토끼대로
들쥐는 들쥐대로 사는 용화세계(龍華世界)
견훤이 꿈꾸었던 평화세상을
언젠가 꼭 이루고야 말
미래불(未來佛)이시여

 

* 바지락 줍는 사람들
바르비종 마을의 만종 같은
저녁 종소리가
천도복숭아 빛깔로
포구를 물들일 때
하루치의 이삭을 주신
모르는 분을 위해

무릎 꿇어 개펄에 입맞추는
간절함이여


거룩하여라
호미 든 아낙네의 옆모습 * 

 
* 둥그런 잠  

오동꽃 저 혼자 피었다가
오동꽃 저 혼자 지는 마을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옛집 마당에 서서
새삼스레 바라보는
조상들의 소나무 동산

 

어릴 적 엄마의 젖무덤 같은
봉분 두 개
붕긋이 솟아 있다

 

저 포근한 골짜기에 안겨
한나절 뒹굴다가
연한 뽕잎 배불리 먹은 누에처럼
둥그렇게 몸 구부려
사르르 잠들고 싶다 * 

 

* 투병통신(投甁通信)

이제
내 비소(砒素)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달빛 인광(燐光) 무수히 떠내려가는
달래 강에 멀리 던진다


먼 훗날
부질없이 강가를 서성이는 이 있어
이 병을 건져 올릴지라도
그 때엔 벌써
글자들이 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을 것을 믿는다


끝내 말하지 못할 것이야말로
영원히 숨쉬는 것


이제
내 비소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일찍이 미친 사내 하나 빠져 죽은
달래 강에 멀리 던진다 *

 

* 순간의 거울 2 - 가을 강 
가랑잎 하나가
화엄사 한 채를 싣고
먼 가람으로 떠난 뒤  

서늘한
기러기 울음
후두둑 떨어져
물거울 위를
점자(點字)인 양 구른다  

노을 타는
단풍밭
보랏빛 이내에 묻히고
(… …)
가랑잎 하나가
가을의 끝
한줌 허무를 싣고
먼 어둠으로 떠난 뒤

* 순간의 거울 15 -풍접화  

벌거벗은 바람이

살짝 손을 내뻗어

족두리꽃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족두리꽃이

살짝 손을 내뻗어

바람의 맨살 허리를

몰래 휘어 감는

참 황홀한 애무의 한때를

전주 설예원(雪藝苑) 안마당에서

엉겁결에

나는 엿보았네  

 

그대 이름은 풍접화(風接花)

바람의 손길이 스쳐야

비로소

피가 도는 여인

이 천지간

저 혼자 몸부림쳐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아아,

살갑게 간질이는

바람의 수작(酬酌) 없이는

족두리꽃 한 송이 피어나지 못함을

전주 설예원 안마당에서

문득 나는 엿보았네 *

 

* 이가림(李嘉林)시인

-1943년 만주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빙하기] 당선, 1993년 정지용문학상, 1996년 편운문학상, 1999년 후광문학상 수상

-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순간의 거울][내 마음의 협궤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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