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고정희 시 모음

효림♡ 2010. 4. 22. 08:01

*고백 - 편지 6 -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다 *

 

*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

 

* 강가에서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쪽 뚝 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 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 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 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

 

*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

 

* 가을 편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하늘에 쓰네  

그대 보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 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 흩으시든가 괴시든가
하느님......죄없는 강물에 불지르는 저 열사흘 달빛을 거두어들이시든가

어룽어룽 광을 내는 내 눈물샘 단번에 절단내시든가 건너지 못할 강에 다리 하나 걸리게 하.시.든.가

하느님......시월 상달 창틀 밑에 밤마다 우렁차게 자진하는 저 풀벌레 울음을 기어코 흩으시든가

내 간음의 가을을 뒤엎으시든가 짱짱한 아궁이에 장작을 피우시든가

하느님......우리 밥숟갈의 정의에 묻어 있는 독을 닦아주시든가

적멸보궁 진신사리 별밭 속을 운행하는 심판의 불칼을 멈추시든가

능곡지변 갈대밭에 늡늡한 능금나무 향기롭게 하.시.든.가

 

*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

 

* 우리 동네 구자명 씨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

 

* 황혼 일기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에, 나는 차분하지 못하여

그 집의 너른 유리창가에 앉으면

바람부는 창밖은 딴 세상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잔조롭게 흔들리는 산목련 줄기 사이로

휙 가로지르는 새도 새려니와

불그레불그레 물드는 

찔레꽃 이파리를 무심히 바라다보면

울컥하고 치미는 눈물 또한 어쩌지 못했다

후르르후르르 산목련 줄기에서 흔들리는 건

산목련잎이 아니라 외줄기 내 영혼이었기

기댈 곳 그리운 내 정신이었기

오래오래 나는 울었다

 

어둠이 완전히 창을 지워 버렸을 땐

넋장이 무너지듯 내 아픔도 깊어져

하염없는 슬픔으로 어깨기침을 했다

누군들 왜 모르랴

어두워지는 건 밤이 아니라

속수무책의 한 생애

무방비 상태의 우리 희망이거니

그 집의 주인은 조용히 다가와

너른 창에 커튼을 내리고

내 좁은 어깨를 따뜻이 감쌌다

(새도 날기 위해 날개를 접는 거란다.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 말야!)

문득, 신경통에 좋다는 골담초 꽃멍울이

건들건들 흔들리는 고향집이 그리웠다 *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사꽃 시 모음  (0) 2010.04.26
첫사랑 시 모음  (0) 2010.04.26
목련 시 모음  (0) 2010.04.16
이가림 시 모음  (0) 2010.04.14
민들레 시 모음  (0) 201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