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복사꽃 시 모음

효림♡ 2010. 4. 26. 08:14

 

* 복사꽃 - 이정하
할 말이 하도 많아 입 다물어버렸습니다. 눈꽃처럼

만발한 복사꽃은 오래 가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
가세요, 그대. 떨어지는 꽃잎처럼 가볍게, 연습이듯 가세요
꽃진 자리 열매가 맺히는 건 당신은 가도 마음은 남아 있다는
우리 사랑의 정표겠지요
내 눈에서 그대 모습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온전히 받아 내 스스로

온몸 달구는 이 다음 사람을 *

* 이정하시집[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푸른숲

        

* 복사꽃 - 이생진 
나는 가끔 오래된 혼백과 이야기하는 수가 있다
북한산 유일한 복사꽃 나무 밑에서처럼

"매월당 김시습이 다녀갔을까"
"다녀갔겠지 언제고 나보다 한 걸음 먼저
왔다 가는 사람이니까 다녀갔겠지"

복사꽃이 기절한다
이걸 못보고 봄이 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세 살 때부터 좋아하던 꽃
죽어서도 사월엔 복사꽃을 찾겠지

 

* 홀랑 벗은 복사꽃 - 이생진

임자 없는 복사꽃 상사병에 걸려

눈부신 햇살에 뒤틀리고 있다

모두 홀랑 벗었다

 

복사꽃 피는 날 *

 

복사꽃 - 송찬호 

옛말에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

그런 눈부신 꽃을 만나면 멀리 피해가라 했다

언덕너머 복숭아밭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울긋불긋 복면을 한

나무들이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바람이 한 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

 

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

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 

* 송찬호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과지성사

 

* 복사꽃에 떠밀려 - 송재학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복사꽃이 핀다 나무보다 먼저

햇빛에 이르러 마음은

희고 붉은 꽃잎 속 타는 혓바닥처럼

복사꽃에 떠밀리면

허리 굽혀 어머니를 껴안는 산길

봄비를 오게 하는 무덤  

 

* 서정가(抒情歌) - 신석정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같이 뚝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휘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 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 버리는..... * 

 

* 복사꽃 피는 날 - 유치환

한풍은 가마귀ㄴ양 고목(古木)에 걸려 남어 있고
조망(眺望)은 흐리어 음우(陰雨)를 안은 조춘(早春)의 날
내 호젖한 폐원(廢園)에 와서
가느다란 복숭아 마른 가지에
새빨갛게 봉오리 틀어 오름을 보았나니
오오 이 어찌 지극한 감상(感傷)이리오
춘정(春情)은 이미 황막한 풍경에 저류(低流)하야
이 가느다란 생명의 가지는 뉘 몰래 몬저
열 여듧 아가씨의 풋마음 같은
새빨간 순정의 봉오리를 아프게도 틀거니
오오 나의 우울은 고루(固陋)하야 두더쥐
어찌 이 표묘(漂渺)한 계절을 등지고서
호을로 애꿎이 가시길을 가려는고

오오 복사꽃 피는 날 왼종일을
암(癌)같이 결리는 나의 심사(心思)여

 

* 복사꽃 아래 천년 - 배한봉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 아이가 걸어 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

* 시와세계 여름

 

* 복사꽃 1 - 오세영

하늘의 하늘의 저 너머엔

아이 하나 깨어 있구나.

푸른 등 켜들고

잠 못 드는 밤.

 

나의 술은

옛사람 봄에 지는

복사꽃 되어

두보(杜甫)의 가슴이나 적셔주거라. *

* 오세영시집[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고요아침


* 이별의 날에 - 오세영 
이제는 붙들지 않을란다.
너는 복사꽃처럼 져서
저무는 봄 강물 위에 하염 없이 날려도 좋다. 아니면
어느 이별의 날에
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의 흔적처럼
고운 아지랑이 되어 푸른 하늘을 아른 거려도 좋다.
갇혀 있는 영원은 영원이 아니므로
금속 테에 갇힌 보석 또한
진정한 보석이 아닌 것
아무래도
네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에는
영원이 있을 성 싶지 않다. 그러므로
네 찬란한 금강석의 테두리에 우리 더 이상 서로를
가두지 말자 .
이제 붙들지 않을란다.
너는 복사꽃처럼 져서
저무는 봄 강물 위에 하롱 하롱 날려도 좋다. 아니면
어느 이별의 날에
네 뺨을 적시던 눈물의 흔적처럼
고운 아지랑이 되어 푸른 하늘을 어른거려도 좋다.

* 무어래요 - 정지용

한길로만 오시다

한고개 넘어 우리집.  

앞문으로 오시지는 말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늦은 봄날

복사꽃 연분홍 이슬비가 나리시거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바람 피해 오시는 이처럼 들레시면

누가 무어래요? *

 

* 題桃花冊 - 石濤 朱若極 [淸]  

 

武陵溪口燦如霞 무릉계구찬여하     

一棹尋之興更도심지흥갱사  

歸向吾廬情未已 - 귀향오려정미이      

筆含春雨寫桃花 - 필함춘우사도화      

 

복사꽃 그림에 부쳐       

무릉계곡 입구가 노을처럼 찬란한데        

쪽배로 찾아드니 흥겨움 그지없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쉬움이 남아서

봄비에 붓을 적셔 복사꽃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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