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 포도, 잎사귀 - 장만영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달빛에 젖어 호젓하고나 *
* 매화
매화꽃 다진 밤에
호젓이 달이 밝다
구부러진 가지 하나
영창에 비취나니
아리따운 사람을
멀리 보내고
빈 방에 내 홀로
눈을 감아라
비단옷 감기듯이
사늘한 바람 결에
떠도는 맑은 향기
암암한 옛양자라
아리따운 사람이
다시 오는듯
보내고 그리는 정도
싫지 않다 하여라
* 비의 image
병든 하늘이 찬 비를 뿌려.....
장미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아름다운 무지개마저 사라졌다
나의 [소년]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를 지닌 채로
이 오늘 밤은
창을 치는 빗소리가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검은 관에
못을 박는 쇠마치 소리로
그렇게 자꾸 들린다.....
마음아, 너는 상복을 입고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 가렴
* 소쩍새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 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 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 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 길손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권의 조이스 시집과
한 자루의 외국제 노란 연필과
때 묻은 몇 권의 노트와
무수한 담배꽁초와
덧없는 마음을 그대로
낡은 다락방에 남겨 놓고
저녁놀 스러지듯이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날마다 떼지어 날아와 우는
검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 속에서
슬픈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시
한 편 쓰지 못한 채
그리운 벗들에게 문안편지
한 장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걸린 밀레의
풍경화만 바라보며 지내던
길손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산등 너머로 사라진
머리처네 쓴 그 아낙네처럼
떠나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영겁의 외로운 길손
붙들 수조차 없는 외로운 길손과의
석별을 서러워 마라
닦아 놓은
회상의 은촛대에
오색 촛불 가지런히
꽃처럼 밝히고
아무 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차가운 밤하늘로 퍼지는
먼 산사의 제야의 종소리 들으며
하룻밤을 뜬 채 세우자
* 향수
나는 바다로 가는 길로 걸어간다. 노오란 호박꽃이 많이 핀 돌담을 끼고 황혼이 있다
돌담을 돌아가면ㅡ바다가 소리쳐 부른다. 바다 소리에 내가 젖는다. 내가 젖는다
물바람이 생활처럼 차다. 몸에 스며든다. 요새는 모든 것이 짙은 커피처럼 너무도 쓰다
나는 고향에 가고 싶다. 고향의 숲이, 언덕이, 들이, 시내가 그립다. 어릴 적 기억이 파도처럼 달려든다
바다가 어머니라면-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바다의 품에 안기고 싶다
안기어 날개같이 보드러운 물결을 쓰고 맘 편히 쉬고 싶다
수평선 아득히 아물거리는 은빛의 향수. 나는 찢어진 추억의 천막을 깁는다. 여기 모래벌에 주저앉아.....
* 사랑
서울 어느 뒷 골목
번지없는 주소엔들 어떠랴
조그만 방이나 하나 얻고
순아 우리 단 둘이 살자
숨박꼴질하던
어린 적 그 때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꼬옹 꽁 숨어 산들 어떠랴
순아 우리 단 둘이 살자
단 한 사람
찾아 주는 이 없는들 어떠랴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가난한 우리 들창을 비춰 줄게다
순아 우리 단 둘이 살자
깊은 산 바위 틈
둥지 속의 산비둘기처럼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의지하며
순아 우리 단 둘이 살자
* 정야
이슬에 젖어
이슬 내린 풀잎을 밟고 가노라면
우거진 수풀 속에
무슨 슬픈 이야기라도 있을 듯한 조그만 집이 한 채
등불 켜지 않아 캄캄한 속에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유리창만이 번쩍거리는 저 낡은 집엔
어느 외로운 이가
세상을 버리고, 세상한테 잊히어
홀로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울타리 가에 숨어 뜰안을 들여다본다
달빛 속에 꽃향기가 그윽히 풍긴다
꽃향기 속에 여인인 양 싶은 이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ㅡ 그것은 바람도 없이
꽃잎만이 낙옆처럼 우수수 지던 날 밤이었다
* 감자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야,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아버지 주먹만이나 하구나
올 같은 가뭄에
어쩌면 이런 감자가 됐을까?
할머니는 무슨 재주일까?
화롯불에 감자를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 저녁 할머니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머리털이 허이언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내 주신 감자는
구워도 먹고 쪄도 먹고
간장에 조려
두고두고 밥 반찬으로 하기로 했다
* 장만영(張萬榮)시인
-1914~1975 황해도 연백 출생
-1932년 [동광]에 [봄 노래]가 김억에 의해 추천
-시집 [양][축제][장만영 시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