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봄비 시 모음

효림♡ 2010. 3. 31. 07:39
* 그 봄비 - 박용래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
 

* 봄비 - 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어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사랑 안에서 자지러지누나!

아, 찔림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이제는 젖빛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누나!

아, 안 올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

 

* 봄비 - 심훈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 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엔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숨도 못 이루시네 *

 

* 봄비 - 김소월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닯이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

 

* 봄비 - 박목월

조용히 젖어드는 초(草)지붕아래서

왼종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月谷嶺 三十里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강마을의 봄비 시름을

 

장독뒤에 더덕순

담밑에 모란움

 

한나절 젖어드는 흙담안에서

호박순 새넌출이 사르르 펴난다. *

 

* 봄비 - 고은          

이 밤중에 오시나부다

오시는 듯

아니 오시는 듯

오시나부다

 

어느 아기의 귀가

이 봄비 오시는 소리 들으시나부다

 

봄비에 젖어든 땅

그 땅 속

잠든 일개미들이 자다 깨어

어수선하시나부다

이제 막 깬 알에서 나온 일개미들이 깨어나

이 세상이

무서운 줄을 처음으로 아시나부다

 

봄비 이 밤중에 오시나부다 오로지 내 무능의 고요 죄스러워라 *

 

* 봄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 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 오르것다. *

 

* 봄비 속을 걷다 - 류시화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 *

 

*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러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

 

* 봄비 - 용혜원 

봄비가 내리면

온통 그 비를 맞으며

하루 종일 걷고 싶다


겨우내 움츠렸던 세상을

활짝 기지개 펴게 하는

봄비


봄비가 내리면

세상 풍경이 달라지고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내 마음에도

흠뻑 봄비를 맞고 싶다

 

내 마음속 간절한 소망을

꽃으로 피워내고 싶다 *

 

* 봄비 - 정진규

미리 젖어 있는 몸들을 아니?

네가 이윽고 적시기 시작하면 한 번 더 젖는 몸들을 아니?

마지막 물기까지 뽑아 올려 마중하는 것들, 용쓰는 것 아니?

비 내리기 직전 가문 날 나뭇가지들 끝엔 물방울이 맺혀있다

지리산 고로쇠나무들이 그걸 제일 잘 한다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

새들도 그걸 몸으로 알고 둥지에 스며들어 날개를 접는다

가지를 스치지 않는다 그 참에 알을 품는다 

봄비 내린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 

 

* 봄비 - 안도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

 

* 봄비 맞는 두릅나무 - 문태준

산에는 고사리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 

 

* 봄비 단상 - 이승복  

막깨어나는 새싹곁에
봄비가 내리는 오후
생각의 껍질을 벗어
눈감아 침몰하는 나

내게서 사랑은 조용히
먼발치서 흔드는 몸짓
외줄타는 철지난 낙엽

애달파했던 허기짐에
몰래 귀동냥하는 사랑
후조의 숨바꼭질 사랑

붉게 그대의 향기가
신기루 되어 보이는
가슴차고앉은 빈자리

그림자로 따라 붙는
고운님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는
봄비가 내리는 오후

 

* 봄비가 내립니다 - 김하인

봄비가 내립니다

이렇게 비 오면 우산 펴들듯 내 키와 몸집에 맞는 사랑 펴들 수 있길 바랍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슬픔과 아픔에 마음 젖고 가슴 적셔지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보고픔 펴들고 당신 만나러 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작은 하늘 삼아 세상 속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부디 내 그리움 나팔꽃처럼 활짝 펴들고 가는 길 끝에 당신 마중 나와주시겠지요 *

 

* 봄비 - 도종환

   새벽에 기관총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두두두두두 지붕을 때리는 소리 연못 위로 방울방울 구멍을 내며 쏟아지는 소리 나뭇단 위에도 다릿돌에도 맑은 총알의 파편이 튀었다 대나무들은 머리채를 풀어 흔들며 등뼈로 총알을 튀겨내고 냉이며 쑥이며 풀들은 피할 새도 없이 꼼짝 못한 채 총을 맞고 있었다 겨울 적막하고 건조한 날들을 이렇게 끝장내겠다는 듯이 다연발 자동소총을 쉼 없이 쏘아댔다
   총소리에 놀라 깨어 일어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멧비둘기 산꿩이 오랜만에 총소리의 서늘한 습도에 목청을 씻었고 총소리 잠시 잦아드는가 싶으니 다람쥐가 꼬리를 치켜들고 쪼르르 달려나와 연못물을 마시며 몸을 털었다
   어제는 이십몇 년 만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이십몇 년 전의 목소리 태연한 듯 다시 잠든 열망을 깨우는 목소리 나는 불이 켜지지 않는 창을 올려다보며 밤을 새웠다 그녀는 그날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새벽은 그만 돌아가라고 나를 떠밀었다 새벽 때문이 아니라 결국 새벽이 오고 말았다는 난감함에 밀려서가 아니라 귀대날짜가 정해져 있었으므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밤새 나를 덮었던 어둠은 지워지고 내 등뒤에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어둠과 함께 돌아왔다 돌아와 메마른 봄언덕을 향해 다연발 자동소총을 갈겼다 아카시아 뿌리가 찢어져 허옇게 드러나고 두두두두두 총소리의 끝에 이어지는 침묵의 순간들이 몹시 길어 그 사랑은 옛사랑이 되고 말았다 소중하여 아끼고 아끼다 날려버린 사랑의 유탄 사랑은 거기서부터 마지막 몇 개의 탄피처럼 말없음표를 툭 툭 찍으며 떨어져 세월 속에 묻혔다 저예요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장 뜨거운 날들이 속절없이 저 혼자 지나가고 묻히고 지워졌다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끝에서 봄비가 쏟아지고 태연하게 돌아와 풀들을 깨우고 두두두두두 기관총을 난사하고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봄비 - 함민복

슬몃 내리는 비

반가워 양철지붕이 소리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약속을 가장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가장 그리운 사람이라고

내리는 봄비

마른 풀잎 이제 마음 놓고 썩게

씨앗은 단단해졌다

언 입 풀려 수다수러워진 양철지붕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온몸 가죽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

* 함민복산문집[미안한 마음]-풀그림

 

* 돌아가는 꽃 - 도종환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석강 시 모음  (0) 2010.04.05
내소사 시 모음  (0) 2010.04.05
박영근 시 모음  (0) 2010.03.22
매화 시 모음  (0) 2010.03.11
짧은 시 모음 2   (0) 2010.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