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영근 시 모음

효림♡ 2010. 3. 22. 08:15

* 꽃이 불편하다 - 박영근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딩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

* 박영근시집[저 꽃이 불편하다]-창비 

 

* 길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 박영근시집[저 꽃이 불편하다]-창비 

 

* 꽃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녹슨 철조망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흐르는 바람에햇살 속에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얼굴 *

* 박영근시선집[솔아푸른솔아]-강

 

* 낙화

바람 속에

저 눈부신 꽃자리에

눈을 감는 허공에

꽃이파리가 떨어진다

내 몸 어디

캄캄한 가지 속에서

햇잎이 저를 밀어올리는 것인가

백목련 건너 모과나무 한 그루

마주 선 채 아침놀 받고

밤 사이 누가 왔나보다

온몸이 흥건하다

 

* 봄비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 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
* 박영근시집[저 꽃이 불편하다]-창비

 

* 흰 빛  

밤하늘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별자리를 볼 때가 있다, 그래
고통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잣소리로 미쳐갈 때에도
밥 한 그릇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치욕일 때도
그것은 어느새 네 속에 들어와 살면서
말을 건네지
살아야 한다는 말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길이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풀씨들이 제가 날아갈 바람 속을 모르듯이
아무도 그 집이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이렇게 우리 헤어져서
너도 나도 없이 흩날리는
눈송이들 속에서

 

그래, 이제 시는 그만두기로 하자
그 숱한 비유들이 그치고
흰 빛, 흰 빛만 남을 때까지 *

* 박영근시선집[솔아푸른솔아]-강

 

* 돌부처
저렇게 오래
돌아앉은 돌부처는 말이 없다

골짜기 저 밑바닥에서 안개는 올라와
지난날의 전나무와 갈참나무 숲을 지우고
어두워가는 살 깊은 곳으로
바위 가파로운 산줄기를 문득 밀어버린다
어느 때쯤 돌부처마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구나
다만 맨몸인 내가
사방 허공에
뼈마디까지 적나라한데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소리 들리고
바람에 불려가는 안개
뜨거운 이마에 맺히는 시간의 물방울들
내 안에서 수천수만 햇살의 숨구멍들이 한꺼번에 열린다
돌부처 하나이 바위 절벽 속에 제 몸을 맡기고 앉아
빙그레 웃고 있다

 

* 변산 기행
1. 산다는 일은 저렇게 곧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기어이 산맥은 길을 끊어 왕포나
채석강에서 바위 절벽 아래 떨어지고
바다 끝까지 달려간 마음도
저녁 노을로 스러지고

2. 방첩대나 지서 사람들이 밤새 술상머리를 두드리며 부르던
그 유행가 소리를 옛집에서 듣는다

선거장이 설 때마다 공화당 표몰이꾼들에게
말들이 막걸리와 그 질긴 만월표 고무신짝을 풀며
신명을 내던 아버지
내 모든 생각들이 숨을 멈추고 엎드려 있던
대공수사대
벌건 갓등 아래
시멘트벽에
발가벗겨진 내 알몸의 그림자
외롭게 춤출 때 듣던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
빨치산 전향자라는 이름

할아버지 살아계시던 옛집엔
지금도 정정한 참오동나무 한그루
아침저녁으로 가지를 흔들며
마당에 옛말을 뚝뚝 떨구고 있다

아들의 목숨을 사기 위해
한 마을을 부리던 논마지기도 당신이 묻혀서
들판을 지켜보고 싶던 선산마저 올려세우더니
그예 돌아가셨다는 말

3. 세월이 어떤 시간의 물살에 허물어져
그 이름이 쓸려가고
살붙이들에게마저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거기 묻힌다 한들
아버지에겐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칼날의 마음


흰 눈에 호랑가시나무 마냥 푸르른
겨울숲에 홀로 들어
그 붉은 열매 앞에

몇 번이나 멈추어서서
고개 돌리고 눈물지었으리

쓰러진 마음들이
바위 절벽으로 저를 세워
파도의 아우성 키우는
변산

4. 파도는 한 바다를 이루어놓고도


저렇게 돌아서고
돌아서서 어느새
물소리 한 자락 없이
제 생애를 비워놓고 *

* 박영근시선집[솔아푸른솔아]-강

 

* 솔아 푸른 솔아 - 백제 6

부르네 물억새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마비 울다 가는
삼 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 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 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 들면 솔잎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

* 박영근시선집[솔아푸른솔아]-강

 

* 절정

매, 미, 들, 이, 매, 미, 들이, 매, 미들이, 매미들이
온통 살아 제 몸을 운다

한낮이 쟁쟁할수록 맹렬하게
지쳐가는 내 몸을 흔들어대고
숲의 여름빛 전체를 들어올린다 
그늘의 허기까지

뜨거운 바람 속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나기

저것이 온 살을 부벼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라면
못견디게 만나
한몸으로 이레나 열흘쯤을 울고
어두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대로 절정이다

한 삶을 지나 문득 내가 듣는
저 눈부신 허공 위의
또다른 생

그러나 끝내 몸도
주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생명의, 그 밝은 첫자리 *

* 박영근시선집[솔아푸른솔아]-강

 

* 외촌 박서방
해종일 손으로 쪽밭 갈아 대파를 뽑고
해거름 막걸리 한 주발로 마저 산 그림자 훔쳐내고
이려어 이렷 소몰던 옛노래 흥얼흥얼 돌아오는데
잘 늙은 여편네 궁둥짝 같은 늦더위 호박 하나 길섶에 숨어 있네
  

 

* 못난 꽃 -박영근에게 - 도종환  

모과꽃 진 뒤 밤새 비가 내려

꽃은 희미한 분홍으로만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돌려보내고 난 뒤 감당이 안되는

막막함을 안은 채 너는 홀연히 나를 찾아왔었다

민물생선을 끓여 앞에 놓고

노동으로도 살 수 없고 시로도 살 수 없는 세상의

신산함을 짚어가는 네 이야기 한쪽의

그늘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늘 현역으로 살아야 하는 고단함을 툭툭 뱉으며

너는 순간순간 늙어가고 있었다

허름한 식당 밖으로는 삼월인데도 함박눈이 쏟아져

몇군데 술자리를 더 돌다가

너는 기어코 꾸역꾸역 울음을 쏟아놓았다

그 밤 오래 우는 네 어깨를 말없이 안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점 혈육도 사랑도 이제 더는 지상에 남기지 않고

너 혼자 서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빗속에서 들었다

살아서 네게 술 한잔 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살아서 네 적빈의 주머니에 몰래 여비 봉투 하나

찔러넣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몸에 남아 있던 가난과 연민도 비우고

똥까지도 다 비우고

빗속에 혼자 돌아가고 있는

네 필생의 꽃잎을 생각했다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목숨과 맞바꾸는 못난 꽃

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못난 꽃. * 

 

* 시인 박영근 - 정희성 

세상에!

무술년 개띠로 태어나 이 나이 되도록

인감도장 하나 없이 살았더란다

 

장례 절차를 논의하면서

남일이가 눈시울을 붉히고

그의 이름 앞에 시인이라는 말 말고

더럽게 다른 말 붙이지 말자고 한다

 

이 말 듣고 집에 돌아와

그의 시집을 펼쳐 본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라고 

생전에 그가 쓴 시의

글자들이 젖은 채 뿔뿔이 달아나려고 한다

 

'길 위에서, 길을 잃으며

저를 찾고 있는

망가진 사내 하나'*

* 고(故)박영근시인의 [길][겨울비]-중에서

* 정희성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 박영근(朴永根)시인

-1958년~2006년 전북 부안 사람

-1981년 시 '수유리에서'등단, 1994년 신동엽창작상, 2003년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저 꽃이 불편하다] 유고시집-[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솔아푸른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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