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침묵 - 도종환
꽃들에게 내 아픔 숨기고 싶네
내 슬픔 알게 되면 꽃들도 울 테니까 *
얼음이 녹고 다시 봄은 찾아와
강물이 내게 부드럽게 말 걸어올 때도
내 슬픔 강물에게 말하지 않겠네
강물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아파하며
눈물로 온 들을 적시며 갈 테니까
겨울이 끝나고 북서풍 물러갈 무렵엔
우리 사랑 끝나야 하는 이유를
나는 바람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이제 막 눈을 뜨는 햇살에게도
삶이 왜 괴로움인지 말하지 않겠네
새 떼들 돌아오고 들꽃 잠에서 깨어나도
아직은 아직은 말하지 않겠네
떠나는 사랑 붙잡을 수 없는 진짜 이유를
꽃들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슬퍼하며
아름다운 꽃잎 일찍 떨구고 말 테니까 **
* 도종환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 모과꽃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듯
벌은 가끔 오는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
* 쑥갓꽃
가장 뜨거울 때도 꽃은
오히려 조용히 핀다
한두 해를 살다가도 꽃은
오히려 꼿꼿하게 핀다
쓰리고 아린 것들 대궁 속에 저며두고
샛노랗게 피어나는 쑥갓꽃
가장 뜨거울 때도 꽃은
아우성치지 않고 핀다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라일락꽃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
* 꽃밭
내가 분꽃씨만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
내가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내 발걸음마다 채송화가 기우뚱거리며 따라왔고
무엇을 잡으려고 푸른 단풍잎 같은 손가락을
햇살 속에 내밀 때면
분꽃이 입을 열어 나팔소리를 들려주었다
왜 내가 처음 본 것이 검푸른 바다 빛이거나
짐승의 윤기 흐르는 잔등이 아니라
과꽃이 진보랏빛 향기를 흔드는 꽃밭이었을까
민들레만하던 내가 달리아처럼 자라서
장뜰*을 떠나온 뒤에도 꽃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사나운 짐승처럼 도시의 골목을 치달려갈 때면
거칠어지지 말라고 꽃들은 다가와 발목을 붙잡는다
슬픔에 잠겨 젖은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면
괜찮다고 괜찮다고 다독이며
꽃잎의 손수건을 내민다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다
내가 산맥을 먼저 보고 꽃밭을 보았다면
꽃밭은 작고 시시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꽃밭을 보고 앵두나무와 두타산을 보았기 때문에
산 너머 하늘이 푸르고 싱싱하게 보였다
꽃밭을 보고 살구꽃 향기를 알게 되고
연분홍 그 향기를 따라가다 강물을 만났기 때문에
삶의 유장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눈을 열어 세상을 보았을 때
거기 꽃밭이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지금도 내 옷 소매에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 *
*장뜰-충북 증평읍의 옛이름
* 고라니
매화꽃 환하게 핀
꽃그늘 아래서 더덕밭을 일구다
오줌이 마려워 밭가로 가
아래옷을 내리고 볼일을 보는데
골짜기 물가에 있던
고라니가 막 뛰어 달아난다
볼일을 멈출 수 없어
그대로 서서
너 이년 다 봤지
치사한 년 혼자 중얼거리는데
산비탈 오르던 고라니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피식 웃는다
어디 나만 봤나요
산꿩도 보고 다람쥐도 보고
멧새들은 맨날 보는데
발밑에 까만
고라니 똥무더기
한 알 한 알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 봄의 줄탁(茁啄)
모과나무 꽃순이 나무껍질을 열고 나오려고 속에서 입술을 옴질옴질거리는 걸 바라보다 봄이 따뜻한 부리로 톡톡 쪼며 지나간다
봄의 줄탁
금이 간 봉오리마다 좁쌀알만한 몸을 내미는 꽃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산벚나무 꽃들 몸을 비틀며 알에서 깨어나오는 걸 바라본다
내일은 부활절
시골 교회 낡은 자주색 지붕 위에서 세워진 십자가에 저녁 햇살이 몸을 풀고 앉아 하루 종일 자기가 일한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거듭난 것들이 모여
논둑 밭둑 비로소 따뜻하게 합니다
참나무 어린잎 하나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저를 이기고 거듭난 것들이 모여
차령산맥 밑에서 끝까지 봄이게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 속에서 거듭납니다
저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 모여
이 세상을 아직 희망이게 합니다 *
* 가구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러듯이
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
* 도종환시집[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 끊긴 전화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비린 것을 눌러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다 지운
저리디저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닫고
침을 삼키듯 목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
입술 밖을 몇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져간 깨알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
* 도종환시집 [부드러운 직선]-창비
*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겨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어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픈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
* 도종환시집 [부드러운 직선]-창비
* 화개(花開)
찬물로 얼굴 씻고 쪽문 열고 나가니
백매화가 엷은 새벽의 가지 끝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어젯밤에 오디주 한 주전자와 큰 대접에 찻물을
가득 담아 건네주고 간 처자는 보이지 않았다
언어장애가 있는지 말을 잘 못하면서도
몇 번씩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알아듣게 하려고
애를 쓰는 처자에게서 산복숭아꽃 향이 풍겨나왔다
칠불사로 가는 이 골짝에 들어온 지 스무 해
혼자 사는지도 그 절반은 되었을 거라는 안주인은
동생이 죽어 어제 고향에 갔다고 했다
관향다원(觀香茶園)
관세음 아니라 향기를 통해 세상을 관하는 이와
차 한 잔 하고 싶어 지었을
이름 예사롭지 않은 민박집 아래로
십 리 이십 리 벚꽃이 피어 화개는 꽃으로 출렁거렸다
우리 속에도 출렁거리는 것이 많아
밤 깊도록 우리가 지닌 세속의 칼 그 양날에 대해
오랜만에 속맘을 털어놓던 도반도
일찍 깨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붓 들어 내 남은 날이
섬진강 모래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화심에 수백 만 개 향기의 촛불을 켜들고도
화려하기보다 은은한 벚꽃처럼 살 수 있기를
며칠째 비어 있는 방명록 여백에 적었다
백매도 산벚꽃도 가만가만 숨을 쉬는
사월 아침 화개 관향다원에서 *
* 어릴 때 내 꿈은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 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 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 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
* 고두미 마을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밭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 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질 찢고 드는 바람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욱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어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집 구들장 밑 오그려 누워 지냈더니
오십 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
* 12~14행은 단재(丹齋) 선생의 한시(漢詩) '가형기일'(家兄忌日)에서 인용
* 도종환시집[고두미 마을에서]-창비
*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
* 문태준엮음[포옹,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