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산수유 시 모음

효림♡ 2010. 2. 23. 08:39

* 산수유 꽃나락 - 박남준   

봄이 와도 아직은 다 봄이 아닌 날
지난 겨우내 안으로 안으로만 모아둔 햇살
폭죽처럼 터뜨리며 피어난
노란 산수유 꽃 널 보며 마음 처연하다
가을날의 들판에 툭툭 불거진 가재눈 같은
시름 많은 이 나라 햇나락

 

봄이 와도 다 봄이 아닌 날
산자락에 들녘에 어느 어느 이웃집 마당 한켠
추수 무렵 넋 놓은 논배미의 살풍경 같은
햇나락 같은 노란 네 꽃 열매
그리 붉어도 시큼한 까닭
알겠어 산수유 꽃 *

 

* 산수유꽃 - 고은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무슨 천벌로
얼지도 못하는 시꺼먼 간장이란 말인가
다른 것들 얼다가 풀리다가
으스스히
빈 가지들
아직 그대로
그러다가 보일 듯 말 듯
노란 산수유꽃
여기 봄이 왔다고
여기 봄이 왔다고
돌아다보니
지난해인 듯 지지난해인 듯
강 건너 아지랑이인가 *

 

* 산수유 - 조병화

도망치듯이

쫓겨나듯이

 

세월을 세월하는 이 세월

돌밭길 가다가

문득 발을 멈추면

먼 산 중턱에

분실한 추억처럼 피어 있는

산수유

 

순간, 나는 그 노란 허공에 말려

나를 잃는다

 

아, 이 황홀

잃어 가는 세월이여 

 

* 산수유꽃나무에 말한 비밀 - 서정주

어느날 내가 산수유꽃나무에 말한 비밀은
산수유 꽃속에 피어나 사운대다가.....
흔들리다가.....
낙화(落花)하다가.....
구름 속으로 기어 들고

구름은 뭉클리어 배 깔고 앉었다가.....
마지못해 일어나서 기어 가다가.....
쏟아져 비로 내리어
아직 내모양을 아는이의 어깨위에도 내리다가.....

빗방울 속에 상기도 남은
내 비밀의 일곱빛 무지개여
햇빛의 푸리즘 속으로 오르내리며
허리 굽흐리고

나오다가.....
숨다가.....
나오다가..... *

 

산수유 - 이문재

어머니, 저기, 늙어, 오신다

바람결 끝 풀어져, 끊어버린 방패연엔 어느새 이끼

情人 떠난 모진 길, 저기 탯줄처럼 풀어져

길을 내 속으로, 당기고 당겨, 묻는데

빛 없는 빛, 산수유꽃

저기, 어머니, 봄 안쪽에다 불을 켜신다

 

* 산수유 - 오세영 

나무의 혈관에 도는 피가

노오랗다는 것은

이른 봄 피어나는 산수유꽃을 보면 안다.

아직 늦추위로

온 숲에 기승을 부리는 독감,

밤새 열에 시달린 나무는 이 아침

기침을 한다.

콜록 콜록

마른 가지에 번지는 노오란

열꽃,

나무는 생명을 먹지 않는 까닭에 결코

그 피가 붉을 수 없다. *

 

* 산수유 - 정진규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지척(咫尺)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떼들, 꿀벌떼들, 우리집 뜨락에 어제 오늘 가득하다 잔치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만개
(滿開)의 산수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오랗게 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
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 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
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왕복(往復)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
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 통신망을 갖게 되지

(光)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카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게 채밀(採蜜)하고 싶은

의 사람아, 그건 아직도 유효해!  *

 

* 산수유꽃 - 신용목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이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 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햇살에 걸려 잔 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文書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대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을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는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 *

 

* 산수유꽃 - 박형준

논둑에 앉아 산수유를 바라봅니다
얕은 구릉에 무리져 핀 산수유가
논바닥 웅덩이에 비칩니다
빛이 꽃 그림자에서 피어납니다
저쪽에서부터 농부가 황소를 몰고
생땅을 갈아엎고 있습니다
논바닥 웅덩이가 흔들립니다
땅에서 향내가 솟구칩니다
소발굽에서 물집 잡힌
저 산수유꽃 그늘
이런 아침에 당신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산간마을의 봄빛이 저만큼 깊습니다

 

* 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

 

* 산수유꽃 필 무렵 - 곽재구   

꽃이 피어서 

산에 갔지요 

 

구름 밖에 

길은 삼십리 

 

그리워서

눈 감으면 

 

산수유꽃

섧게 피는

꽃길 칠십리 *

 

* 산수유 나무 아래서 - 곽재구 

꽃뱀 한 마리가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바람이 보라색과 흰색의 도라지 꽃망울을 차례로 흔드는 동안

꼭 그만큼의 설레임으로 당신의 머리칼에 입맞춤했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 안에 얼마나 넓은 평원이 펼쳐지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는지......

사랑하는 이여, 나 가만히 노 저어

그대에게 가는 시간의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웁니다

바로 곁에 앉아 있지만

너무나 멀어서 먹먹한 그리움 같은

언제나 함께 있지만 언제나 함께 없는

사랑하는 이여

꽃뱀 한 마리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습니다

   

* 산수유꽃 진 자리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코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 

 

* 산수유나무 - 이선영

처음부터 그는 나의 눈길을 끌었다
키가 크고 가느스름한 이파리들이 마주보며 가지를 벋어올리고 있는 그 나무는
주위의 나무들과 다르게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기 위해 잠시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산수유나무라고 했다
11월의 마지막 남은 가을이었다
산수유나무를 지나 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이를테면 천년 전에도
내가 그 나무에 내 영혼의 한 번뜩임을 걸어두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되풀이될 산수유나무와 나의 조우이리라는 것을
영혼의 흔들림을 억누른 채 그저 묵묵히 지나치게 돼있는 산수유나무와 나의 정해진 거리이리라는 것을

산수유나무를 두고 왔다 아니
산수유나무를 뿌리째 담아들고 왔다 그 후로 나는
산수유나무의 여자가 되었다

다음 생에도 나는 감탄하며 그의 앞을 지나치리라 *

* 고규홍저[나무가 말하였네]-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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