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고형렬 시 모음

효림♡ 2010. 2. 18. 08:21

* 성에꽃 눈부처 - 고형렬  
일월 아침 얼음빛 하얀, 성에꽃 흘러내린다
저 슬픈 마음 네 눈동자 속에서 흐른다
낙화를 슬퍼한 옛 시인들아, 나는 오늘
그 성에꽃들이 물이 되는 소리를 듣는가
반짝이는, 말없는, 붙잡을 수 없는 은빛 잎
창밖은 모래알이 떨고 있는 추운 아침
가질 수가 없으므로 살아 있고 아름다운
하늘과 마음만 얼지 않은 일월 한가운데
추위를 껴안고 함께 밤을 꿈꾼 소년아
너에게 모두 보여준 만다라를 다 보았니
해가 마당에 찾아오고, 성에는 흐르는 아침
동햇가 그 엄동설한을 잊지 말고 살아라
이불을 어깨에 둘러감고 바라보던 창얼음
물이 되어 흐르는 은빛 부처, 찬란한 햇살
그때 내겐, 성에꽃을 부를 이름이 없었다 *

 

* 사람꽃  

복숭아 꽃빛이 너무 아름답기로서니
사람꽃 아이만큼은 아름답지 않다네
모란꽃이 그토록 아름답다고는 해도
사람꽃 처녀만큼은 아름답지가 못하네
모두 할아버지들이 되어서 바라보게
저 사람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
뭇 나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잉어가 아름답다고 암만 쳐다보아도
아무런들 사람만큼은 되지 않는다네
사람만큼은 갖고 싶어지진 않는다네 *
* 고형렬시집[성에꽃 눈부처]-창비

 

옥수수수염귀뚜라미의 기억
옥수수수염귀뚜라미
80층 승강기 아래로 내려갈 땐 잠잠하다
울음을 뚝 멈추고 승강기가 기계음을 듣는다
첨단이 아닌 이런 것들이 기척할 때가 있다
수염귀뚜라미는 철봉대 근처에 있다
기계음은 그의 풀잎 가슴속으로 들어가
해마에서처럼 사라진다
해마에 기억의 흔적은 물방울 먼지처럼 남는다
소리는 사라지고 벌써 있지 않다
80층 체인이 출렁이는 소리가 벽 속에서 들린다
기술은 그 소리를 감추려고 혼신을 바친다
내 신문 같은 얼굴이 센서에 비치면
문은 비서처럼 얼른 옆으로 열린다 그리고
곁에 서서 내가 나가기를 기다린다
나가지 않으면 문은 계속 심리처럼 서 있는다
그때 햇빛이 내 파란 핏줄 손등에 닿는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한다 늦여름 매미처럼
나는 갑자기 미열의 아득함으로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잡는다 가을 구름 하나
아파트 뒷산 위에 떠서 불타고 있다
마지막 불 칸나가 화려하게 단장했어라,
수염귀뚜라미 하나 내 허파꽈리에 초기 암처럼
마지막 광선 속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이름을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
옥수수수염귀뚜라미 *

 

* 조태 칼국수 
눈이 우르릉거리는 사나운 날엔 국수를 해 먹는다. 애곤지 알이 명태머리 꼬리가 처박는 폭설. 된장을 푼 멸치국물이 가스불에 설설 맴도는, 까닭없이 궁핍한 서울. 엉덩이 들고 홍두깨로 민 반죽을 칼질하고 밀가루 뿌려놓은 긴 국숫발. 바다 모래불 가 눈발을 그리는 20년 객지, 하며 창밖에 펄펄 날리는 하늘 눈사태 바라보는 나는 이런다

이런 날은 이 조태 칼국수만이

저 을씨년하고 어두운 날씨를 이길 수 있다 *

 

* 4월  

죽은 것들이 돌아오느라
죽은 것들이 눈이 멀어 돌아오느라
줄기 부르트고
꽃으로 애쓰던 잊은 것들 찾아오느라
살아 있던 날을 기억하려고
다른 '나'로 빠져나오려고
허연 죽음의 중심 목질부를 만지려고
물을 찾아 다시 움을 틔워 일어나느라
구름을 모아 문을 열고 달려가느라
접혔던 부문 하염없이 펴느라
가장 빛나는 생명의 꿈을 따르느라
좁은 길을 풀고
기억할 수 없는, 복제할 수 없는
형상을 입느라 자기 하나 옷을 만드느라
천지는 눈 시리게 숨쉬기 바쁜
안 보이는 이름을 찾아내느라
한줄기 목숨을 얻어 끊어진 길 이으려고
길을 대고 처음 생에 닿느라
아 이름 부르며 부스러진 티끌들 모아
안 지치고 기쁘게 찾아오느라 *
 

 

* 달려라, 호랑아-자화상 
달려가는 호랑의 껍질은 아무것도 아니다
두 앞발 사이 깊숙한 가슴 근육
덜겅거리는 심장, 출렁이는 간, 긴장하는 목뼈
헉헉대는, 터질 듯한 강한 폐 근육
얼룩거리는 붉은 어깨와 엉치등뼈, 거기 붙은 살점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커다란 구슬 같다
마구 흔들리는 골은 산산조각 깨어질 듯
무거운 육신을 잔혹하게 흔들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모자이크된 육체가 뛰어가는 정신
주먹같이 생긴 허연 뼈들, 링 같은 꽃의 구근
기둥 같은, 널빤지 같은 뼈들이 가득한 육체
먹이를 뒤쫓아 맹추격하는 호랑의 구조
그놈들 가끔 보며 세상을 가르친다 지오그래픽의
제작자를 탓하지 않지만 생식기를
혹주머니처럼 흔들며 뛰어가지 않으려는 그의
부끄러운 표정의 질주를 비웃는다 이것이 '세계'를 보는
나의 유일한 창구, 한없이 저놈은 비위사납다
이해하면서 더러운 자식! 더러운 자식! 하며
달려라 조금만 더, 뛰어라 호랑아
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 달려라 *

 

* 풀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날 풀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놀란다// 

풀들에게 눈이 있었다, 계속 풀을 뽑아던지자 풀들이 눈치가 생겼다

풀들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어딘가로 숨는다, 나는 처음엔 은유를 알지 못했다// 

풀들은 나의 발소리를 들으면 지금도 두려움에 떤다// 

풀들을 찾는다, 풀들이 보이지 않는다, 풀들이 사라졌다, 풀들은 명민해지고 나의 눈은 어리석어졌다,

낮 속에서 풀들은 밝아지고 나의 눈은 어두워진다

이 둘은 끝없이 도망하고 추적한다// 

나는 풀들에게 모든 것을 노출한 채 잔디밭에 앉는다, 한숨 쉰다// 

풀들은 광선 같은, 어둠 속 눈부처의 움직임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 법을 그들은 체득했다, 나는 제자리걸음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 꿇음의 제자리걸음으로 버틸 작정이다  

풀들은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보다 민감하게 움직인다

그러니까 풀들은 나의 눈 속에서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풀들이 어디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나는 그 나이, 이제 풀의 소리를 듣는다

 

* 처자 
주방 옆 화장실에서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킨다
엄마는 젖이 작아 하는 소리가
가만히 들린다
엄마는 젖이 작아
백열등 켜진 욕실에서 아내는
발가벗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쏴아 하다 그치고
아내가 이런다 얘, 너 엄마 젖 만져봐
만져도 돼? 그러엄. 그러고 조용하다
아들이 아내의 젖을 만지는 모양이다
곧장 웃음소리가 터진다
아파 이놈아!
그렇게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욕실에 들어가고 싶다
셋이 놀고 싶다
우리가 떠난 먼 훗날에도
아이는 사랑을 기억하겠지 *

 

 

* 수박 

  이상하다, 이번에는 수박이다. 줄기가 기어간다. 줄기가 어둠바닥까지 기어나갔다. 그 끝은, 가끔 개의 앞발이 돌무덤을 파던 곳. 굼벵이와 나비들이 몰래 노는 곳
  어둠과 볕이 가까운, 눈멀기 쉬운 경계의 도로표지판이 서 있는 앞쪽,
  그곳이 이 수박밭의 끝이다.

  문득 수박줄기는 포복을 멈췄다,
  더 갈까? 순이 뒤돌아본다. 참 오래 한 일이지만 무작정 간다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을 안다. 잎에 가린 뿌리 쪽이 보이지 않는다. 둥지를 틀고 머리를 감아올린다. 저쪽에서 물 들어오는 소리 들린다. 두더지가 줄기라도 물어뜯는 날엔 끝장이다. 식물이라고 위험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니까.

  수박의 눈은 멀리 뻗어나온 귀여운 줄기 끝,
  줄기 밑으론 마디가 있어, 실뿌리 마디는 땅내를 맡고. 오직 수원은 저 대한민국 양평 이 수박밭이다. 거기서만 물을 대준다.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태양이 하늘에 있는 법. 낮의 태양에 대해서 말해 뭘 할까, 그러나 수박은 태양 하나만 믿지 않는다.
  그것이 제일 좋은 자율성

  그러니까 이번에는 수박으로 태어났다,
  뿌리는 깊지 않으나 표토의 모든 양분을 비로 쓸듯 가져간다, 퇴비, 죽은 벌레, 쇠똥, 계분. 수박이 좋아하는 이름들은 만나면 뒤섞인다.
  이렇게 수박도 수박을 기르다 정이 들어, 수박밭은 골라지고 말문이 열린다.
  이 평화 속에서 수박은 햇살을 수분에 섞어 당분을 만든다. 절묘한 기술

  수박밭을 기웃대는 옥수수는 내년엔 수박이고 싶은 얼굴. 식물도 윤회하지만, 글쎄 아무나 수박이 되는 건 아닐 테지. 수박도 모르는 일이 있어, 내년엔 어디로 건너갈까?
  그러나 이 밭은 내년에도 수박밭일 확률이 높다.
  어림잡아 이 둑 너머는 옥수수밭. 내년에도 이 근처 어디서 우리는, 지금처럼 수박이든 옥수수든 황금땀방울

  비가 올 것 같다. 주인이 삽을 들고 나온다. 수로를 낼 모양이다. 수박은 다 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아프리카에서부터 수박은 늑대새끼들처럼 돌아다니며 아무 데서나 사냥하고 새끼 치지 않았으니까.
  눈 내리는 겨울, 우리가 어디 있는지 가끔 궁금해 출출할 때 있지만,
  수박은 평범한 다년생이 아니다. 녹색의 천둥 번개를 찍으며 한여름만 살다 가는 일년초다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강상(江上) 유람(遊覽)이라면 

유람으로나 가겠다

제일 마음 가난한 사람 하나와

곁에 초라한 나를 세워

그를 위해서

세월의 강물 건너가는 그림자로

얼굴도 팔도 하나가 된

이제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나를 찾으러

제일 아름다운 사람 하나와

가다가 나는 없어지고

그 사람만 남게 해

이 해 뜨고 해 지는 세상에서

그 사람 제일 가슴 아프게

만들어

혼자 이물에 세워놓고

나의 깨끗한 친구 어깨 옷이여

바람보다 슬픈 마음으로나

간다면 온다면

그를 데리고 만사 접어두고

그냥 유람으로 간다면 *

* 고형렬시집[밤 미시령]-창비

 

* 서 있는 터럭에 대한 감상(感傷) 

처서가 지나면 나의 팔의 터럭에 가을이 온다
생땡볕이 렌즈를 통과하는 빛으로 바뀔 때 나는
그 속으로 통과하는 청벌레들의 울음을
깎는다 그리고 나는 전봇대처럼 선다 그다음
나는 더이상 걸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백로가 오면 나의 팔은 터럭에서 더 예민해져
풀대처럼 이울며 까칠하게 모근엔 샘이 말라
주인 모르게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고
나는 다른 나로 태어나는 나를 두 눈으로 본다
저리 터럭도 한쪽으로 머리를 향하는데
나는 살짝 그것들의 가을을 핏빛 눈길로 본다 *

* 고형렬시집[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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