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본 지 오래인 듯 - 장석남
가을 꽃을 봅니다
몇 포기 바람과 함께 하는 살림
바람과 나누는 말들에
귀 기울여
굳은 혀를 풀고요
그 철늦은 흔들림에 소리나는
아이 울음 듣고요
우리가 스무 살이 넘도록 배우지 못한
우리를 맞는 갖은 설움
그런 것들에 손바닥 부비다보면요
얘야 가자 길이 멀다
西山이 내려와 어깨를 밉니다
그때 우리는 당나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타박타박 길도 없이
가는 곳이 길이거니
꽃 본 지 오래인 듯 떠납니다
가을은 가구요
*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꽃 위에 펼친 맵씨 좋은 구름결들 보아라
옷고름 풀린 봄볕을 보아라
작약 한창인 때 작약밭에서 들리는
어떤 늙은 할머니가 손주들을 대문 밖으로 내보내며 하는
말소리를
업고 가는 중인
업혀가는 중인
아침 바람을 보아라
꽃지고 잎 돋듯 웃어라
빰은 웃어라
조약돌 비 맞듯 웃어라
유리창에 별 돋듯 웃어라
한옥 짓는 마당가
널빤지 위에 누워 낮잠 들어가는 대목수의 꿈속으로 들어가
잠꼬대의 웃음으로 배어나오는
작약밭의 긍정 긍정 긍정 긍정
또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또 문 열고 나오는 꽃 보아라
긍정 긍정 긍정 긍정 *
* 장석남시집[빰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 돌층계
저무는 돌층계를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면
저 아래는 결코 흙마당이건만
철썩이는 붉은 꽃바다가 있는 것만 같아요
멀찍이 이만큼 서서 바라보니 다행이지
무슨 멀미 나는 운명들이 생겨나듯
풀잎들 노을을 이고 마당가를 철썩여요
막돌들을 업어다가 안아다가 놓고, 놓고, 놓고
또 두어 뼘을 재서 큰 모판이라도 밀어가듯이 판판히 놓고 하여서
서너 층계를 만들었더니
오르락내리락 종교와도 같은, 의심과도 같은 리듬이 생겨났습니다
배고픈 김에 묵은 김치 한 보시기나 며느리 몰래 먹고 물 마시고 나앉듯
무끈히 힘 빼며 올린 산돌 하나는 꽃 한번 피고 지니
그대로 그렇게 본토박이 할아버지가 되어 있습니다
이마에 자꾸 주름 잡히어
거울 보며 손가락으로 주름 펴면서도
돌층계 아래로는 여전히
꽃바다가 와서 수군대는 것 같아요 *
* 장석남시집[빰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나는 오래된 정원을 하나 가지고 있지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더 이상은 아물지도 않았지
시간을 발밑에 묻고 있는 꽃나무와
이마 환하고 그림자 긴 바위돌의 인사를 보며
나는 그곳으로 들어서곤 했지 무성한
빗방울 지나갈 땐 커다란 손바닥이 정원의
어느 곳에서부턴가 자라나와 정원 위에
펼치던 것 나는 내
가슴에 숨어서 보곤 했지 왜 그랬을까
새들이 날아가면 공중엔 길이 났어
새보다 내겐 공중의 길이 더 선명했어
어디에 닿을지
별은 받침대도 없이 뜨곤 했지
내가 저 별을 보기까지
수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나는
떡갈나무의 번역으로도 읽고
강아지풀의 번역으로도 읽었지
물방울이 맺힌 걸 보면
물방울 속에서 많은 얼굴들이 보였어
빛들은 물방울을 안고 흩어지곤 했지 그러면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 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삶이 상처라고
길을 나서는 모든 아픔과 아픔의 추억과
저 녹슨 풍향계만이 알 뿐이지 *
* 국화꽃 그늘을 빌려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 익살꾼 소나무
오후나 되어야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서편 산 아래 길가의 작은 소나무 한 그루는 참 익살스럽기도 하지
가지 사이에 날려온 비닐을 달고는 비닐 속에다 대견한 듯 제 저녁의 모습 일부를 비춰보고 있으니
발가락 열 개를 활짝 벌리고 발가락 사이에 바람을 쏘이는 표정으로 *
* 속삭임
솔방울 떨어져 구르는 소리
가만 멈추는 소리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
새벽달 깨치며 샘에서
숫물 긷는 소리
풋감이 떨어져 잠든 도야지를 깨우듯
내 발등을 서늘히 만지고 가는
먼,
먼, 머언,
속삭임들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 피는 오이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의 닷 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말도 없이 그앨 만나면 내 안에 작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서른 넘어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는 차분해진 시선을 한 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눈길 곁으로 포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어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는 흔들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아주 꺾어지진 않을 만큼만 바람아.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어여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밤비
밤비는
참으로 멀리서부터 밤비는
왔구나
낙숫물에 깎이는
섬돌귀는
이 비와 같이 다니느라
뭉툭하게 닳아졌고
나는 새로 선 비석처럼 귀를 세우고
아득한
비의 여정을 엿듣는다 //
이 시간
오동잎 뒤에 세워둔
푸른 잠은 깊어지고
(푸르다니!)
푸른 잠이
너울대며 가는 길도
밤비의 발걸음을 닮았다//
그렇지, 밤비 후득이는
오동잎이
우리 생이지
후득여도 너울대는 게
그게 생이야
소주 생각 간절한 밤비 속
우리 생이야//
오동잎 박차며
코너워크하는 밤비 소리//
귀의 골짜기에
흙탕물이 가득 찼다
모두 지나가면//
차고 단단한 가을물이
무릎에 구름을 앉히고
동냥밥을 먹는,
또는 손 탁탁 털고
쫄쫄 굶는
그게 생이지
그게,
그것이,
우리 생이지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 그믐
나를 만나면 자주
젖은 눈이 되곤 하던
네 새벽녘 댓돌 앞에
밤새 마당을 굴리고 있는
가랑잎 소리로서
머물러보다가
말갛게 사라지는
그믐달
처럼
* 장석남의시집[젖은 눈]-문학동네
새가 날아간다
새가 없다
地上에 없는 새
새에게 없는 지상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
꽃 밖으로 나가라고
때가 지나도 시들지 못하는
옛 만국공원 산책로의 水菊들
생각의 뒤통수를 비춘다 *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 부엌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일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거덕대는 그 소리는 방금
내가 생각하다 놔둔 시 같고,(오 시 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빗발은 나
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가는 허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 (오 시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
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레인지 위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여라
내가 빠져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엌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 보지 않아도 또 시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고요히 명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데 보는 오 얄팍한 은색 시집 같고. *
* 장석남시집[젖은 눈]-문학동네
-1965년 경기도 덕적 출생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맨발로 걷기] 당선, 1992년 김수영문학상, 1999년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젖은 눈][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