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에 저 뿔나무 미쳤네
미쳤어 저 혼자
낮술에 취했는가 취해
아슬아슬 저 산 저 절벽 벼랑에
벌겋게 벌겋게 저 혼자 미쳤어
어떤 여자랑 차 타고
초가을 산, 그 어떤 산 지나가는데
저 절벽의 벼랑 끝
저 뿔나무 미쳤네 미쳤어 *
* 김용택시집[그 여자네 집]-창비
* 시인
배 고플 때 지던 짐 배 부르니 못 지겠네
* 첫 눈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 이 별
서리 친 가을 찬물을
초승달같이 하이얀 맨발로
건너서 가네 *
* 그 나라
오늘도 뒤안에 목단꽃이 피었습니다
햇살이 따가운 한낮이면 지치도록 활활 타오르다가 해진 저물녘이면
화려한 꽃잎들을 서럽도록 접습니다
두 눈을 꼭 감고
따라가고 싶어요
그
서러운 나라에
* 눈 오는 집의 하루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또
밥 먹는다 *
* 봄옷 입은 산 그림자
그저께 엊그저께 걷던 길
어제도 걷고 오늘도 걸었습니다
그저께 엊그저께 그 길에서
어제 듣던 물소리
오늘은 어데로 가고
새로 찾아든 물소리 하나 듣습니다
문득 새로워 걷던 발길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귀기울여봅니다
아, 그 물소리 새 물소리
봄옷 입은 산그늘 강 건너는 소리입니다 *
* 세상의 길가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내 야윔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
* 춥지요
춥지요
많이 춥지요
당신 가시는 걸음걸음
나는 당신 뺨에
따스한 온기이고 싶어요
춥지요
많이 춥지요 *
* 약이 없는 병
그리움이, 사랑이 찬란하다면
나는 지금 그 빛나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파서 못 견디는 그 병은
약이 없는 병이어서
병 중에 제일 몹쓸 병이더이다
그 병으로 내 길에
해가 떴다가 지고
달과 별이 떴다가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수없이 돌아흐르며
내 병은 깊어졌습니다
아무리 그 병이 깊어져도
그대에게 이르지 못할 병이라면
이제 나는 차라리 그 병으로
내가 죽어져서
아, 물처럼 바람처럼
그대 곁에 흐르고 싶어요
* 사랑하는 너에게
네가 잠 못 이루고 이쪽으로 돌아누울 때
나도 네 쪽으로 돌아눕는 줄 알거라
우리 언젠가 싸워
내게 보이던 고운 뺨의 반짝이던 눈물
우리 헛되이 버릴 수 없음에
이리 그리워 애가 탄다
잠들지 말거라 깨어 있거라
먼데서 소쩍새가 우는구나
우리 깨어 있는 동안
사월에는 진달래도 피고
오월에는 산철쭉도 피었잖니
우리 사이 가로막은 이 어둠
잠들지 말고 바라보자
아, 보이잖니
파란 하늘 화사한 햇살 아래
바람 살랑이는 저 푸른 논밭
화사한 풀꽃들에 나비 날지 않니
(아, 너는 오랜만에 맨발이구나)
이제 머지 않아 이 얇아져가는 끕끕한 어둠 밀려가고
허물 벗어 빛나는 아침이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화창한 봄날 날 잡아 대청소를 하고
그때는 우리 땅에 우리가 지은 농사
쌀값도 우리가 정하고
없는 살림살이라도
오손도손 단란하게 살며
밖으로도 떳떳하고 당당하자꾸나
그날이 올 때까지 잠들지 말고
어둔 밤 깨어 있자꾸나,어둠을 물리치며
싸우자꾸나, 아침이 올 때까지
손 내밀면 고운 두 뺨 만져질 때까지
그리하여 다리 쭉 뻗고 곤히 잠들 때까지
네가 뒤척이는 이 밤
나라고 어찌 눕는 꼴로 잠들겠느냐
* 서시
세월이 가면
길가에 피어나는 꽃 따라
나도 피어나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릴라요
세월이 가면
길가에 지는 꽃 따라
나도 질라요
강물은 흐르고
물처럼 가버린
그 흔한 세월
내 지나 온 자리
뒤돌아다보면
고운 바람결에
꽃 피고 지는
아름다운 강 길에서
많이도 살았다 많이도 살았어
바람에 흔들리며
강물이 모르게 가만히
강물에 떨어져
나는 갈라요 *
* 김용택시집[연애시집]-마음산책
* 맨발
가을비 그친 강물이 곱다
잎이 다 진 강가 나무 아래로 다희가 책가방 메고 혼자 집에
가는데, 그 많은 서울 사람들을 다 지우고 문재는, 양말을 벗어
옆에다 두고 인수봉을 바라보며 혼자 술 먹는단다
이 가을 저물 무렵
다희도, 나도, 나무도, 문재도 고요한 혼자다 *
-박수근
내 등짝에서는 늘 지린내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업은 누이를 내리면 등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지요
어머니는 동이 가득 남실거리는 물동이를 이고 서서 나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땀에 젖은 소 고삐를 내게 건네주었습니다 *
* 산벚꽃
저 산 너머에 그대 있다면
저 산을 넘어 가보기라도 해볼 턴디
저 산 산그늘 속에
느닷없는 산벚꽃은
웬 꽃이다요
저 물 끝에 그대 있다면
저 물을 따라가보겄는디
저 물은 꽃 보다가 소리 놓치고
저 물소리 저 산허리를 쳐
꽃잎만 하얗게 날리어
흐르는 저기 저 물에 싣네 *
* 흔적
어젯밤에 그대 창문 앞까지 갔었네
불 밖에서 그대 불빛 속으로
한없이 뛰어들던 눈송이 송이
기다림 없이 문득 불이 꺼질 때
어디론가 휘몰려가던 눈들
그대 눈 그친 아침에 보게 되리
불빛 없는 들판을
홀로 걸어간 한 사내의 발자국과
어둠을 익히며
한참을 아득히 서 있던
더 깊은
더 춥던 흔적을 *
* 농부와 시인
아버님은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집을 지으시고
그 집에 살며
곡식을 가꾸셨다
나는
무엇으로 시를 쓰는가
나도 아버지처럼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시를 쓰고
그 시 속에서 살고 싶다 *
* 연애 1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나무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강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산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질 때, 나무와 산과 강에게로 걸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해가 질 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산그늘처럼
걸어가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
* 김용택시집[연애시집]-마음산책
* 그대 생각 1
하얀 탱자꽃 꽃잎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장입니다
푸른 보리밭에 아침 이슬 반짝입니다. 밭 언덕에 물싸리꽃은
오래된 무명 적삼처럼 하얗게 피었습니다. 세상을 한참이나 벗어 나온
내 빈 마음 가장자리 부근에 꿈같이 환한 산벚꽃 한 그루 서늘합니다
산이랑 마주 앉을까요. 돌아서서 물을 볼까요
꽃 핍니다
배꽃 핍니다
우리집 뒤안에 초록 잎 속에 모과꽃 핍니다
민들레 박조갈래 걸럭지나물 시루나물 꽃 봄맞이꽃 꽃다지도 핍니다
저 건너 산 끄트머리 돌아서는 곳 아침 햇살 돌아오는 논두렁에
느닷없이 산복숭아 한 그루 올해 연분홍으로 첫 꽃입니다
저 작은 몸으로 꽃을 저렇게나 환하게 피워내다니요
눈을 감아도 따라옵니다
꽃입니다 꽃이요 꽃, 만발한 꽃밭입니다
꽃 피면 꽃 따라 다니며 어쩔 줄 모르던 나이 지나
꽃나무 아래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피는 꽃도 지는 꽃도 한참씩 건너다봅니다
꽃이야 지겠지요 꽃이야 지겠지요
저기 저 하얀 탱자꽃 꽃잎 다섯 장이 다 진다구요
그대도 없이 나 혼자 허리 굽혀 탱자꽃을 줍습니다 *
* 김용택시집[연애시집]-마음산책
* 그대 생각 2
꽃이 필 때까지
꽃이 한 송이도 남김없이 다 필 때까지
꽃이 질 때까지
꽃이 한 송이도 남김없이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꽃잎이 날아갑니다
그대 생각으로 세월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깊어질 대로 깊어진 그 세월 속을
날아가던 꽃잎들이
그대에게 닿았다는 소식 여태 듣지 못했습니다 *
* 김용택시집[연애시집]-마음산책
* 해가 진다
꾀꼬리가 노랗게
산을 날고
뒤안 우물에 붉은 앵두가 떨어진다
강가에는 나무들이
반듯하게 서 있고
바람이 분다
물이 흐르고
나무가 서 있는 것을
가만히 본 후에
해 지는 서산을 본다
해가 진다
해가 져, 해가 지누나
그리고
나는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김용택시집[연애시집]-마음산책
* 서해에서
해가 진다
해가 지는구나
해가 졌다
그래
내가 졌다
지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해뿐이로구나
져도 아름다운 것은
사랑뿐이로구나 *
* 김용택시집[연애시집]-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