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방 - 이영옥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꽃잎 한 장이 방충망에 붙어 어깨를 떨고 있다
아무도 없는 여기서 한참이나 울었던 것 같다
저 슬픔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읽던 책 속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는데
아까보다는 조금 더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
눈물을 찍어대고 있다
꽃이 열매에게 제 자리를 내어줘야 할 때
어디로 뛰어내려야 할지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을 때
꽃이 고운 제 빛깔을 거두며 어두워지려할 때
옆에서 아무도 다독여 준 이가 없었구나
이쪽 철망에 걸러진 삶이
저쪽 철망으로 몸을 끼워 보지만
세상은 빈틈없이 촘촘한 봄날이었다 *
* 사라진 입들
잠실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 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 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잡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 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 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메러 왔다
섶 위의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니가 누에의 캄캄한 뱃속을 들여다보며 풀어낸 희망과
그 작고 많은 입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른고치를 흔들어 귀에 대면
누군가 가만가만 흐느끼고 있다
생계의 등고선을 와삭거리며
종종걸음 치던
그 아득한 적막에 기대
* 능소화 붉은 입술로
여기가 세상의 막다른 곳인가 뼈와 살 밖으로 흘러나온 줄기 끝에 능소화 소스라치게 피어있다 울컥울컥 토해 낸 피 빛 상처들 폭염의 고요를 한 겹 벗겨내면 밤새 복 받치게 운 것 같은 발그레한 네 눈동자 마주치고 타닥타닥 숯불처럼 피어올랐던 마음 한꺼번에 후욱 꺼뜨리며 뜨겁게 단 살 내음 식히려는지 소나기에 긴 머리를 풀어 헤치는 꽃 세상의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은 아득한 허방아래 모두 죽어있고 생의 전부를 던져 너는 죽음을 살고 있었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누워있던 너는 독약이 온 몸에 퍼지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붉은 살점을 떠 매고 여름의 끝으로 갔다
그대와 눈을 감고 입맞춤을 한다면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난 수천 개의 바람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빛나는 계절 뒤에 떼로 몰려오는 너의 허전한 바람을 마중해주는 일이며 빈 가지에 단 한 잎 남아 바르르 떠는 내 마른 울음에 그대가 귀를 대보는 일이다 서로의 늑골 사이에서 적막하게 웅성거리고 있던 외로움을 꼼꼼하게 만져주는 일이며 서로의 텅 빈 마음처럼 외골수로 남아 있던 뭉근한 붉은 살점 한 덩이를 기꺼이 내밀어 보는 일이고 혀 밑에 감춰둔 다른 서러움을 기꺼이 맛보는 일이다 맑은 눈물이 스민 내가 발뒤꿈치를 들고 오래 흔들리고 있었던 그대 뜨거운 삶의 중심부를 가만히 들어 올려주는 일이다 *
* 이영옥 시인
-1960년 경북 경주 출생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사라진 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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