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 김추인
문을 나서면 문득
지도보다 먼저
길이 내 곁으로 다가서며
너 어디 갈래? 묻는다
못 들은 척 호주머니나 뒤적뒤적 딴청이면
그래 그래 그래
길이 그냥 길을 내준다
슬픈 날은 슬픔 쪽으로
쓸쓸한 날은 아직 길도 안 난 산기슭
아직 읽어내지 못한 내 이승의 끄트머릴
힐끗 보여주기도 하면서
억새바람 뒤로 희끄무레 돌아도 가면서
그래 그래 그래
끄득이며 길을 내준다
수신된 메세지 하나 없이
억수 쏟아지고 사무치는 날
문 밖에 서면
너 어디 갈래? 묻지도 않고
젖은 골목길이 추적추적 따라온다
구부정한 그의 어깨도 흐림이다 *
* 늘보의 특강
저런, 휘휙 스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내 시간의 회전판은 어지럽고
간단없는 생의 행군은 코뿔소처럼 달리며 꿈 꾸었겠다
나무늘보처럼
세상 모든 느림을 불러 아주 천천히
늘보처럼 나무에서 졸린 눈 뜨고
늘보처럼 나뭇잎이나 질겅이고
내가 밥숟갈을 떠 넣으며 그에게 두 번 눈 흘기고도
모기를 철썩 때려잡는 사이
화면 속 나무늘보는
아직도 이 쪽으로 고개가 돌아오는 중이다
무심한 저 얼굴 한 송이 좀 봐
꽃송이 같지
늘보처럼 돌아보다
길도 잃고 시간표도 잊고
이제사 순금 꽃대를 뽑아 올리는
내 금란화도 좀 봐봐
늘보처럼 엉금엉금 사랑하다
가장 늦게 우리 돌아선다면 생강꽃 같은 이별, 참 곱겠다
나무늘보처럼 그렇게 *
* 속수무책입니다
봄에는 모두 날아오르고 싶은 게다
세상 모든 풀잎들, 숲
숯덩이 빛으로 잠겼던 내 생각의 갈기조차
죄다 겨드랑이 벌리고
꽁지를 치키고 산불처럼 후둑후둑
날아오르는 시늉을 한다
젊은 신갈나무가 제 팔뚝마다 푸른 문신을 넣고
취한 짐승이 어찔 황사길을 넘어간다 비명 같은 사월아
두어 번은 더 깜깜 그믐밤을 지새어야
저 불의 추종자들
날마다 뜨는 일상의 여름으로 내려 앉으리
당분간은 출렁이는 날갯죽지가 병이다
그냥 타거라 내 사랑 *
* 사유 반가상
그대는 한 생에 나무였으리라
꽃이었다가 바람이었으리라
물이었다가 강이었다가 생육이 바다
그대 깊푸른 바다는 파도이며 근육이며 산맥이며
사랑, 그 무거운 벽이었으리라
시간의 하수인인 몸이여
우리 궁륭 같던 시간도 날마다 낡고 삭으면서
삐걱이는 벽이 아니던가 벽속의 꿈은 튼튼해서
달아나라 달아나라
한 장 빨래를 꿈꾸지 않았던가
펄럭이는 자유이며 새이며 문이던
거지 같은 내 사랑 부처님아 또 소쩍새 운다 내가 아픈 모양이다
문 안도 문 밖도 없는 사유의 존재여
나는 지금 네 몸에 주렁주렁 달린 상념의 나뭇잎들을 보고 있다
* 김추인시집[전갈의 땅]-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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