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투명한 속 - 이하석

효림♡ 2010. 6. 25. 08:13

 

                           

 

* 투명한 속 - 이하석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쇳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쇳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민음사 

 

* 폐차장 1 
산에 가 붙들리고 싶다
너의 어깨 위로 너의 모자 그늘 아래로
산이 멀리 있다

우리가 다툰 지도 오래 되었다
우리의 욕망이 서로 높아가는 만큼
산은 저렇게 낮고 낮다
그러나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은 여전히 내려오지 않고

우리는 욕망의 기름 덮인 검은 흙 위에 앉거나
기름으로 탄 쇳조각 더미에 기대어 일어나며
늘 서로 조금씩 달아나면서
주검으로나마 저 산에 갈 수 있을지 지쳐 묻는다 *

 

* 그래, 길이 있다 
그래, 길이 있다
굴참나무 울창한 숲을 안으로 가르며
전화줄처럼 명확하고도 애매하게
길이 나 있다
아침을 지나 아무도 없는 숲 안에서
나는 외롭고, 지나치게, 무섭다
길 저쪽 깊은 숲속으로 곧장 난
길 저쪽 어쩌면 길 저 끝에
무엇인가가 있는 듯 느껴진다
굴참나무 잎들이 쌓인 숲 저 안
어둠의 폭풍이 소용돌이치는 곳 *

 

* 매미 
매미가 운다
중앙공원 인근 우체통 옆
밤의 나무 그늘에 우표처럼 붙어서


이 밤중에 자지 않고 웬 울음?
불빛 밝아 낮인 줄 아나?
그보다는 더 그리우니까?


그러니까 그리우니까?
아직도 서로 완전히 오지 않아서
불빛 아래 차오르는 그늘의 수위를 재며
우리는 가로수 그늘 아래 마주 서 있고


매미는 새벽까지도 울음 그치지 않네
이산가족들 만나 껴안고 우는 사진 구겨진
신문 덮고 집 없는 이는 저 구석에서 자는데

오직 울음으로 만나질 제짝 그려
지하에서 한사코 지상에 올라온 것들
제 모든 걸 울어 밝혀 잠 못 드는 * 

 

* 호박 
비탈로만 기어올라 돌담 위에 전신을 뉜 비루한 삶이 피우는 꽃들이 어찌 저리 큰가? 끝까지 일관되게 그 노란 꽃의 논리를 따라 뻗치던 여름. 그 여름이 이룬 역사의 무늬와 힘줄이 호박의 겉과 속을 밝게 지펴놓는다. 할머니는 그 거대한 열매의 꽉 찬 속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길을 안다.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의 똥으로 채운 그 위에 씨를 놓고 흙으로 덮는 것으로 자신의 꿈의 서사를 펼쳤으니, 저 까칠까칠한 호박 넝쿨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당신의 생의 탯줄이 뻗어 나온 길을 되짚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익은 누런 금빛 사상을 툇마루에 덜렁 놓아둔 게 참 당당하다. *

* 누런 가방

가방들을 두고 침묵의 마을이라 한 화가를 기억한다
그의 가방은 잘 열리지 않고
늘 구석에 놓여 있었겠지
주인의 마음처럼

지퍼란 지퍼, 멜빵이란 멜빵
끈들은 모두 가지런히 빠짐없이
닫혀지고 꼭꼭 매여진 채
여행 중인 검은 가방들이 서울역 무궁화호 개찰구 가까운 바닥 여기저기
놓여 있다

인공 쇠가죽의 불빛 덮어쓴 위쪽은 금빛으로 빛나는데
그 아래쪽은 불룩하니 캄캄하다
가방 주위 어딘가에 있을 주인의 주머니도 가방만큼 자주 열리지 않아
뭐든 타협이 잘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갈 데가 있고
집요하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바쁘게 일어설 때까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방들은 완강하게 입 다물고 자리를 지킨다

안에 든 게 뭐든 제 것이 아닌
가방은 아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다
열어보려는 이도 없이 가방들은 버려진 채 떠도는 늙은이의 어깨들처럼
위가 짓눌린 채 구겨져 있다 * 

 

* 담배 
담배 때문에 수명이 짧아진다고 텔레비전에선 야단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죽지 않고 싸우며
여전히, 담배 연기가 아늑하게 인간의 내외에 깔려 있다

그렇지만 나도 결국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긴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제고, 그래서
오히려 끊는 게 더 공포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끊어야 한다면 담배보다 오히려 더 해로운 것들,
연애나 결혼, 또는 이렇게 시 만드는 일들......
이 치명적인 것들 끊는 게 더 급하지 않을까

담뱃갑이 여기,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그리고 재떨이는 거기 놓여 치워지지 않는다
각이 져 있거나 둥글게 파여진 라이터들은
아름다운 무늬나 디자인이 새겨져 그들 곁에 늘 있다
그것들은 서로 없어지지 않는다
끊을 수 없는 사랑처럼 끈질기게
서로 연기 한 모금씩 피워서 나누어 가지길 기대하며 있다 *

 

* 깊이에 대하여

자판기 커피 뽑는 것도 시비꺼리가 될 수 있는지, 종이컵 속 커피 위에 뜬 거품을 걷어내면 "왜 거품을 걷어내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커피의 깊이를 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마음에 없는 말일 수 있다. 인스턴트 커피에 무슨 근사한 깊이가 있느냐고 물으면, 대단치 않는 깊이에도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해 준다. 모두 얕다.  기실 따뜻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단찮은 깊이까지 사랑한다 해도, 커피는 어두워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실 어둠의 깊이를 얕볼 수 없다. 싸고 만만한 커피지만, 내 손이 받쳐 든 보이지 않는 그 깊이를 은밀하게 캐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걸 누가 쉬이 들여다볼 수 있단 말인가?

 

* 하늘
은행나무의 하늘이 노랗게 내려앉는다.
겨울비 오기 전 잠깐 밟아보는 푹신한 하늘.

나무 위엔 봄 여름 가을 내내 가지들이 찔러댔던 하늘이 상처도 없이 파랗다.

가지들이 제 욕망의 잎들을 떨군 다음 겨울 오기 전 서둘러 제 꿈을 바람의 실로 꿰맸기 때문이다. *

 

* 뒤쪽 풍경 1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 이겨 흘러내리고
흙속에 스며들어 풀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속으로 증발해버린다.
땅속에 깃든 쇠 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곁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

 

* 분홍강

내 쓸쓸한 날 분홍강 가에 나가

울었지요, 내 눈물 쪽으로 오는 눈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사월, 푸른 풀 돋아나는 강 가에

고기떼 햇빛 속에 모일 때

나는 불렀지요, 사라진 모든 뒷모습들의

이름들을.

 

당신은 따뜻했지요.

한때 우리는 함께 이 곳에 있었고

분홍강 가에 서나 앉으나 누워있을 때나

웃음은 웃음과 만나거나

눈물은 눈물끼리 모였었지요.

 

지금은 바람 불고 찬 서리 내리는데

분홍강 먼 곳을 떨어져 흐르고

내 창 가에서 떨며 회색으로 저물 때

우리들 모든 모닥불과 하나님들은

다 어디 갔나요?

천의 강물 소리 일깨워

분홍강 그 위에 겹쳐 흐르던. *

* 이하석시집[유리 속의 폭풍]-문학과지성사

 

* 이하석 시인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1971년 현대시학 등단.  대구문학상,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

-시집 [투명한 속][유리 속의 폭풍][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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