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엔 길이 없어 - 박태일(1954~ )
그리움엔 길이 없어
온 하루 재갈매기 하늘 너비를 재는 날
그대 돌아오라 자란자란
물소리 감고
홀로 주저앉은 둑길 한끝 *
* 당각시
울며 자며 옛 일을 잊었습니다
달빛 자락자락 삼줄 가르는 밤
당각시 겨드랑이 아득한 벼랑
두 낯 손거울엔 제 후생이 죄 담겼나요
해 걸러 보내주신 참빗 치마 저고리는
어느 때 어느 님 보라시는 뜻인지요
당각시 고깔 위로 오색동동 빗물 번지고
당각시 한 세월에 소지장처럼 마른 가슴
골바람은 돌아돌아 당집 돌담만 허무는지
날밤 아침엔 애장터 여우 기척도 마냥 반가워
앞산 햇살 끝동 좇아 나서면
당각시 토닥토닥 발자국 위로
마른우레 가는 소리
원추리 원추리 핍니다 *
* 불영사 가는 길
구름 보내고 돌아선 골짝
둘러 가는 길 쉬어 가는 길
밤자갈 하나에도 걸음이 처져
넘어진 등걸에 마음 자주 주었다
세상살이 사납다 불영 골짝 기어들어
산다화 속속닢 힐금거리며
바람 잔걸음 물낯을 건너는 소리
빙빙 된여울에 무릎 함께 적셨다
죽고 사는 인연법은 내 몰라도
몸이야 버리면 다시 못 볼 닫집
욕되지 않을 그리움은 남는 법이어서
하얀 감자꽃은 비구니 등줄기처럼 시리고
세상 많은 절집 소리 그 가운데
불영사 마당 늦은 독경 이제
몸 공부 마음 공부 다 내려놓은 부처님은
발등에 묻은 불영지 물기를 닦으시는데
지난달 오늘은 부청님 오셨던 날
불영사 감자밭 고랑에 물그러미 서서
서쪽 서쪽 왕생길 홀로 보다가
노을에 올라선 부처님 나라
새로 지은 불영사 길
다시 떠난다 *
* 풀나라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젖쟁이 노랑쟁이 나생이 잔다꾸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
파도밭을 담장으로 삼고 사는 나라
예순 아들이 여든 어머니 점심상을 차리고
예순 젊은이가 열 살 버릇대로
대소사 상다리 이고 지는 마을
사람만 봐도 개는 굼실 집 안으로 내빼
이름 잊혀진 채 그저 풀로만 불리는
강바랭이 씀바구 광대쟁이 독새기
이장 댁 한산 할배 마을 회관 마릇바닥에
소금 전 양 등줄 꺼지게 누운 마을
토광 옆 마늘 종다리는 무슨 힘으로
아침저녁 울컥벌컥 잘도 돋는데
한때 마흔 이제 스무 집 어른들
집집 다 버리고 마을 회관 두 방
문지방 내외하며 자고 먹는 풀나라
굴 양식 뜰것이 아침마다 허옇게
저승길 종이꽃처럼 피는 바다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
* 유월
더디 넘는
봉산도 재넘이
오라버니 치상길
치마폭에 감겨 젖는 소발굽 요령소리며
사철쑥 덤불 아래
돌귀만 차도
산제비 날아가는 유월도 초사흘 *
* 구천동(九天洞)
사람들은 혼자 아름다운 여울, 흐르다가 흐르다가 힘이 다하면 바위귀에 하얗게 어깨를 털어버린다. 새도 날지 않고 너도 찾지 않는 여울가에서 며칠째 잠이나 잤다. 두려울 땐 잠 근처까지 밀려 갔다 밀려 오곤 했다. 그림자를 턱까지 끌어당기며 오리목(五里木)마저 숲으로 돌아누운 저녁, 바람의 눈썹에 매달리어 숨었다. 울었다. 구천동(九天洞) 모르게 숨어 울었다 *
* 꽃마중
공산도 팔공산 봄나들이는
환성사 부도밭 돌부처님 구경
문중도 끊기고 공부도 약하신지
목부터 위론 날짐승 떼 주고
배꼽 더 아랜 길짐승 따 주고
연노랑 진진분홍 연등으로 벅신거리던
사월도 초파일 다 지났는데도
시주 보살네들 육보 공양이 없었던지
보렴보렴 보름밤에 잠 없이 깨어
별 하나 깜박 눈물을 닥고
별 둘 깜박 부레 끓이며
길 바쁜 나더러 꽃가지 마중
모과꽃은 자라좆 사과꽃은 물좆
산 아래까지 쫓아와 꽃가지 마중 *
* 내소사
전나무 층층나무 꽝꽝나무가 길을 낸다
하늘로 오르는 길 제 밖으로 나선 길
어느 길은 산마루에 절집 한 채 앉혔다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이다
목향 냄새 환한 골짝이 열렸다 닫힌다
백의관음 오래 잊었던 눈물이다
부안 곰소 갯벌 수미단은 무슨 장엄이어서
가까운 섬 먼 섬 그리 반짝였던가
야다법석 누비질 구름도 저문 하늘가
아미타 아미타 대웅보전으로 드는 고기떼
백의관음 다시 낭떠러지다 밤이다
고요히 기왓골 밟는 옷자락 소리 *
* 박태일시집[풀나라]-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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