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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효림♡ 2010. 7. 22. 14:32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ㅡ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넣고
떠나라 *

*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책만드는집

 

*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돌아서면 까먹고 이제 늙었나 봐

불 위에 얹어놓은 냄비 졸아붙었다며

한탄하는 아내의 그 한마디에

어머니 생각합니다

적어놓지 않으면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고

언젠가부터 난초 향기조차 느낄 수 없다시며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그렇게

후각이 없어지더라고 혼잣말하시는 어머니

연휴 때 세상 떠나면 차가 막혀

아이들 내려올 때 불편할지 모른다고 걱정하시던

아버지 돌아가신 뒤 어머니 기대어 계시던

먼산 바라보며 옛날 생각합니다.

자식에게 폐 끼치지 않고 세상 떠나겠다며

병원 가시는 것도 거절한 채 단명(斷命)하신

아버지 생각하며 어머니 생각합니다

가을이 온 산의 잎들을 물들이거나

마당에 봄볕이 고양이같이 따사로울 때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어 고즈너기 미소 띠며

세상에 나서 그렇듯

사랑했던 사람이 있어 행복합니다 *

* 김재진시집[먼산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그림같은세상

 

*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뜨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쌀 안치듯 찰싹되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山寺)의 풍경(風磬)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初老)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

* 김재진시집[먼산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그림같은세상

 

* 바람 
지도 펴놓고 들여다보라 가고 싶지 않은가
주왕산 월악산 덕유산 매화산
꺽정이 발길 따라 묘향산과 구월산
마천령 서쪽으로 백석 시인 살던 곳
가고 싶지 않은가
여량리 봉평리 문곡리 미천리
미치듯 미칠 듯 가고 싶지 않은가
안나푸르나 강가푸르나 초오유 마칼루
칸첸중가 바라뵈는 산마을에서
때아닌 우박 맞으며 서 있고 싶지 않은가
끝내 바람인 사람 바람으로 살고
끝내 나무인 사람 나무처럼 살고 *

 

* 따뜻한 그리움 
찻잔을 싸안듯 그리움도
따뜻한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생각하면 촉촉이 가슴 적셔오는
눈물이라도 그렇게 따뜻한 눈물이라면 좋겠네

내가 너에게 기대고
또 네가 나에게 기대는
풍경이라도 그렇게 흐뭇한 풍경이라면 좋겠네

성에 낀 세상이 바깥에 매달리고
조그만 입김 불어 창문을 닦는
그리움이라도 모락모락
김 오르는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 풀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

 

* 화개

숯에서 종소리가 난다

고온의 불을 견딘 대나무 숯이

처마 끝에 매달려 땡그랑 땡그랑

풍경소리를 낸다

뜨거워질수록 더 맑아지는 종소리

얼마나 더 가야 소리 하나 얻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살아야 텅, 비어버릴 수 있을까

가을날

눈부신 섬진강 물빛

무거운 마음 내려놓고 화개에서 하동까지

놀러 가는 내 몸이 단풍잎 같다 *

 

* 가득한 여백 
만약에 네가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면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으리라
쏟아지는 빗줄기에 머리카락 적시며
만약에 네가 울고 있다면
눈물 멎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리라
설령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때아닌 장미를 고른다 해도
주머니에 손 넣은 채 웃기만 하리라
가시에 손가락 찔린 네 예쁜 눈이
찡그리며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을 다만
안타까운 추억으로 간직하리라
만약에 내가 너로부터 버림받는 순간 온다면
쓸쓸한 눈빛으로 돌아서리라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 긴 사간을
너의 후회가 와 채울 수 있도록
가득한 여백으로 비워두리라

 

* 가을입니다 
한 그루 나무이고 싶습니다
메밀꽃 자욱한 봉평쯤에서
길 묻는 한 사람 나그네이고 싶습니다
딸랑거리며 지나가는 달구지 따라
눈 속에 밟힐 듯한 길을 느끼며
걷다간 쉬고, 걷다간 쉬고 하는
햇빛이고 싶습니다
가끔은 멍석에 누워
고추처럼 빨갛게 일광욕하거나
해금강 바라뵈는 몽돌밭을 지나는
소금기 섞인 바람이고 싶습니다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이
구두 아래 바지락거리는 이맘 때
허수아비처럼 팔을 벌린 내 마음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 연꽃  
연꽃 위에 앉고 싶다
아니 연꽃이 아니라 연잎 위에
쟁반같이 넓은 이파리 위로
물방울같이 또르르 굴러보고 싶다
사는 게 너무 추워 글썽이는 날
햇빛에 스며들어 뜨거워지고 싶다
진흙 속에 발 디뎌도 더럽힐 수 없는
홍련이나 백련, 아니면
보랏빛 눈길로 끌어당기는
수련에 가 안기고 싶다
먼길 걸어 네 속에 주저앉고 싶다 *

 

* 산꽃 이야기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가령 산딸기가 하는 말이나
노각나무가 꽃 피우며 속삭이는 하얀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톱 한 자루 손에 들고 숲길 가는 동안
떨고 있는 나무들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
꿈틀거리며 흙 속을 사는 지렁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제는 사라져 찾을 길 없는
늑대의 눈 속으로 벅차오른 산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너로부터 닫혀 있는 나와
나로부터 닫혀 있는 너의
그 많은 창문들 하나하나 열어 볼 수 있다면
휘영청 달뜨는 밤
산꽃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

 

* 사랑의 이유

당신이 꼭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장점보다
결점이 두드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결점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어쩌다 보니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힘들던 마음 역시
내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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