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효림♡ 2010. 8. 2. 07:56

*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나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바람벽:집안의 안벽

때글은: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은

쉬이고: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 하고

앞대: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개포: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 백석저 백시나역[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산초당

 

* 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 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수라(修羅):'아수라'의 줄임말. 싸움 따위로 혼잡하고 어지러운 상태에 빠지늘 것.

어니젠가:'언젠가'의 평안도 사투리. 여기서는 '어느 사이엔가'라는 뜻

싹다:삭다. 긴장이나 화가 풀려 마음이 가라앉다

가제:'갓''방금'의 평안도 사투리

 

* 팔원(八院) -서행시초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妙香山行)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 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팔원(八院):평안북도 영변군 팔원면

서행 시초(西行詩抄):관서지방(평안도)을 기행하고 쓴 시

진진초록:매우 진한 초록

자성:평안북도 북단에 있는 지명

내지인:일본인

내임을 낸다:배웅을 한다. '내임(냄)'은 '배웅'의 방언

아이보개:애보개.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아 하는 사람 

 

*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오늘은 정월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옛날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로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언만

나는 오늘 때 묻은 입던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어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 고향 사람의 조고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 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날엔 으례히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은 그 어느 한 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어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던 본대로 원소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을

외로이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아득하니 슬펐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

아, 이 정월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독이 탕탕 터지고 호궁(胡弓)소리 삘뺼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엔 자꼬 이 나라의 옛 시인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나 이백 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모려나 이것은 옛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

객고(客苦):객지에서 당하는 고생

억병:매우 많이

가업집:길거리에서 하는 영업집

반관:작은 중국 식당

원소(元宵):중국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에 먹는 새알 모양의 전통 음식

오독독:중국 폭죽의 일종. 화약을 재어 점화하면 터지는 소리를 자꾸 내면서 불꽃과 함께 떨어지게 만든 것

아모려나:'아모'는 '아무(某)'의 옛말. 아무렇게나 하려거든 하라고 허락하는 말

옛투:예투(例套). 즉 상례가 된 버릇

 

*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

 

* 탕약(湯藥)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위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구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
 

곱돌탕관:광택이 나는 곱돌은 깎아서 만든 약탕관 

숙변:숙지황. 한약재의 한 가지 

백봉령:솔뿌리에 기생하는 복령에서 나오는 한약재. 땀과 오줌의 조절에 효험이 있고 담증, 부증, 습증, 설사에 쓰임

산약:마의 뿌리. 강장제이며 유정, 몽설, 요통, 설사에 쓰임  

* 백석저 백시나역[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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