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도 비밀한 그 골짜기 속에
이미 바깥에서 모두 저버리고
안으로만 대피(待避)해 온 사람들
다급히 새 왕국을 세우고자 했네
그러나 정사(情死)의 뒤끝처럼
미처 상호(相好)를 가다듬고
법의(法衣) 하나 제대로 음각할 틈 없었던
조급한 욕망의 흔적들만을
여기에 어지러이 남겨놓았네
그랬다네, 그들은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둔 돛배 한 척 가득히
창칼에 상한 육체들을 실어나르며
하루 낮과 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우려
돌을 쪼개고 힘든 목도질 나섰다네
하지만 원수 같은 첫닭 우는 소리에
제 어미 품에 깃들이지 못한 축생들
얼굴이 으깨어지고 심장이 터져
무더기로 떼죽음당해갔다네
더러 창자가 꾸역꾸역 기어나오고
사지가 갈갈이 찢겨나간 채
그 격정의 강물에 떠가기도 했다네
그리하여 절정의 시간 후에 엄습하는
허무처럼 그곳은 한 발 내밀면
절벽인 나락의 숲으로 남았다네
끊임없이 슬픔의 항해를 재촉하던
아흔 굽이 죽음의 기항지였다네 *
* 임동확시집 [운주사 가는 길]-문지
* 몸체가 달아난 佛頭에 -운주사 가는 길 2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고 간섭할 수 없음으로 더 이상 쫒겨다닐 염려가 없었던 그곳은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한 열망들이 드디어 찾아낸 스스로들의 유배지였다. 그러나 再起의 칼날이 제 안에 있음으로 하여 시시각각
좁혀오던 譏祭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임시 망명 정부였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자들이 야음을 틈타 험한 산을 넘고 찬 이슬 내린 들을 건너 흘러 들어와, 또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뗏목을 엮으며 헛되고 헛된 욕망의 春畵를 끌에 새기던 은신처였다
그리고 폭풍우 거센 천년의 밤이 순식간에 지나가자, 여기저기 몸체가 달아난 佛頭에 陰部를 양각하며
기다림의 완성을 꿈꾸던 긴 침묵의 성채였다. 그러나 오래 잊혀졌기에 누구에게도 발각당하지 않았던
그리하여 한때나마 창검의 틈입을 받지 않았던 갈 수 없는 그리움의 西天이었다
* 기억만으로 행복한 -운주사 가는 길 5
비록 누군가 이미 다녀간
엿보아버린 낙원이었을지라도
그리하여 그 날의 시체처럼 딱딱하고
앙상한 흰 뼈들만 목잘린 석불처럼
나뒹굴고 있었을지라도
우린 잠시나마 그 숲에서 행복했었다
잘려나간 수족 같은 추억들을 거두거나
엉망이 된 천 개의 희망들을 파묻고
다시 파헤쳐보길 반복하면서
여전히 완강하게 내일을 꿈꾸고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마음껏 광란의 춤을 출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아무래도 좋았다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기억의 탑 속에
거기 그대로 응결된 시간의 陰刻이여
우린 저버렸음으로 잃을 게 없고
그래서 더욱 탐하지 못한 새벽의 신비를
아주 오래 생각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파국이 밀어닥쳤고
또 황망히 각자의 피 묻은 옷가지를 챙겨 나섰지만
그 시절 거칠게 활활 타올랐던
너와 나의 모든 숨구멍이여
비록 버림받은 저주의 세월이었을지라도
한때나마 부끄러운 영혼들을 의탁하며
몸 숨길 수 있었던 은신처였으므로
우린 어디서든 향기로울 수 있었다
비록 잘못든 길인 줄 알면서도
못내 견디지 못해 이탈을 노래하고
잠시나마 어떤 맹서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끝내 자유로울 수 있었던 우리는
* 화엄 또는 화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화엄이라는 말을
화음으로 잘못 알아들은 당시 아홉 살짜리 딸이
"응 그 뜻을 나도 알겠다"며 내게 설명하려 들던 일이
몇 년을 두고 기억 속을 떠나지 않는다
일생을 면벽하고도 도달하지 못할 화엄의 경계를
마치 나비 한 마리, 흰 구름 한 점이 지리산을 넘어가듯
필시 알아갈수록 엄청난 압박이고 구속일 게 분명한 관념어의 등선을
제가 피아노를 배우며 귀동냥했을 화음쯤으로
선뜻 받아들여 내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우린 그렇게라도 행복할 수 있었으며
종내는 무의미했을 관념의 제국들조차
한때나마 누구에게든 넉넉하고 아늑한
희망의 샘이 되어주었으리라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린 앞으로도 한참 동안
그처럼 밉지 않은 오류와 오독의 길 위를 서성이리라
그리하여 어느새 수정하거나 번복하고 싶지 않은
하나씩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삶이 먼저냐, 길이 먼저냐
채 따지기도 전에 취재차는
들을 지나고 내를 건너
해남 대흥사의 피안교를 지난다
그렇듯 사는 일이
다 의미있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여인은 시퍼렇게 멍든눈자위를 가린 채
일주문을 지나가고
또 어떤 자는 관광객으로
정진교를 생각없이 건너간다
일찍이 불과 바람과 바람의 화를
전쟁과 병과 굶주림의 삼재를 면하려
제 유품을 이곳에 맡겼다는
어느 노승의 지혜란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것
해탈문을 해탈하고 지나간 자가
과연 얼마나 되었으며
눈알 부라리는 사천왕문을 짐짓 모른 채
스쳐간 자는 또 얼마던가
모든 행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피는 꽃만이 아름다웠으랴
어찌 지는 꽃이 슬프기만 했으랴
그러나 막막한 물음으로 무거워진 천길 벼랑 위
그만 움쭉달싹 못 하고 주저앉듯
붉은 동백꽃이 진다
군사용 작전도로를 따라
문이란 문을 한꺼번에 통과해온
상상봉 저편
구름다리 근처에 새겨진 키 큰 마애불
연거푸 '거기 진불이 있느냐'
되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누구 하나 못 나서자
화난 부처 그냥 돌아서려는데
그 때 동자승으로 변한
십육나한 하나
쪼르르르 오솔길로 달려간다
그 속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진불암 토안 스님
시주 들어온 푸른 수박 한 통 쪼개
붉은 속마음마저 다 보여주고 *
* 구성폭포(九聲瀑布)
이루지 못한 것들이 내는 소리가
어찌 아홉 가지뿐이겠는가
눈 쌓인 계곡 얼음장 속에서도
연신 목숨처럼 이어져 흘러내린 슬픔들이
이제야 한껏 소리 내어 울어보기라도 하듯
그만 넋을 놓아버린 그 자리
수직의 절벽마다 흰 거품이 상사뱀처럼 엉겨붙는다
그나마 잊혀지기 않기 위해 한켠의 돌탑으로 똬리를 틀거나
흔적도 없이 휩쓸려 가버린 세월들을 기억하며
다시는 거슬러가거나 반복할 수 없는 것들이
저를 부르는 적막 속으로 망명도생(亡明圖生)하고 있다
오로지 단 한 번의 순간만 있는,
그러기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나누거나 가늠해볼 수 없는 것들이
그 어디 아홉 가지뿐이겠냐며
그때마다 겨울 폭포는 가둘 수 없는 울음을 토해내듯
더울 깊어진 제 안의 물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잠시나마 붙잡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살아 솟구쳐 오르다가 더러 얼음기둥이 되어, *
* 구성폭포-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 계곡에 있는 폭포.
* 임동확시집[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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