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마음의 달 - 천양희

효림♡ 2010. 8. 2. 07:55

* 마음의 달 -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忘草)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 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

 

* 자화상

조롱 속에 거울 하나 넣어 놓았더니

거울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살았다는 문조(文鳥)

사막 속에 오아시스 놓여 있었더니

물에 비친 모랫길을 제 길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걸었다는 낙타

 

그게 혹

내가 아니었을까

 

* 밥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 외길

가마우지새는 벼랑에서만 살고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삽니다.

유리새는 고여 있는 물은 먹지 않고

무소새는 둥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고소 공포증도 폐쇄 공포증도 없습니다.

공중이 저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놓아두시지요.

외길이 나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요. *

 

*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꽃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 숨은 꽃  

다른 꽃밭을 꿈꾸며 어떤 꽃들은 둥근 꽃씨를 옮겼을 것입니다. 세상의 구석까지 꽃말을 전하고 꽃소식을 뿌렸을 것입니다.

꽃에게도 꽃의 마음이 있다는 것일까요. 늦은 꽃망울들 다투어 필 때, 우리는 무슨 속셈이 있어 꽃길을 따라간 건 아니었습니다.

제 속을 열고 웃고 있는 꽃잎들과 잎 속의 푸른 무늬들, 꽃술의 의미들. 꽃들은 왜 모두 다른 색깔을 가졌는지 꽃들은 왜 피고

지고 또 피는지 꽃잎 뜯어 꽃점을 치며 꽃같이 붉은 사랑 기다렸으나 봄길은 너무 짧고 저녁은 일찍 저물었습니다. 노고초 몇

포기 종일 고개 숙일 때 무명초도 애써 제 이름 적지 않습니다. 우주를 물들이는 한 꽃송이. 잎새마다 꽃등을 달고 찰랑댑니다.

꽃물결 꽃사태 꽃사태 꽃천지 속 꽃가마 타고 꽃구경이나 가고 말겠습니다. 꽃의 몸으로 환생하고 말겠습니다. 꽃이라고 다

꽃답게 꽃피우는 건 아닐 것입니다. 숨어서 피는 꽃 있다면 그 꽃 속은 더 환할 것입니다. 비밀의 꽃장이란 얼마나 넘기고 싶은

페이지입니까. 지금 누가 그걸 읽는 중일까요. 누가 그를 어디에다 숨긴 것일까요. *

 

* 들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

 

* 문장들

당신은 어떻게

관악산이 웃는다고 쓰고

가지가 찢어지게 달이 밝다고 쓸 수 있었나요

개미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인생은 덧없다고 쓸 수 있었나요

음악은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은 또 어떻게

나무에는 강렬한 향기가 난다고 쓰고

꽃이 구름처럼 피었다고 쓸 수 있었나요

삶을 그물이라고 쓰고

환상이 삶을 대신할 수 없다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은 다시 어떻게

환상도 사실이라고 쓰고

가난도 때로는 운치가 있다고 쓸 수 있었나요

자기 자신이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고 쓰고

당신의 의지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의 문장들에 많은 빚을 졌다고

나는 쓸 수밖에 없습니다 *

 

* 참 좋은 말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

 

* 나무에 대한 생각

오래된 나무를 보면

삶 속의 나이테가 보인다

줄기는 줄어들고 뿌리만 깊다

사는 게 이런 거였나 중얼거린다

도대체 뿌리가 어디까지 갔기에

가도 가도 뿌리내리지 못하는지

참을 수 없이 가볍게 살고 싶지만

삶이 덜컥, 뿌리 뽑히는 것 같아

무지하게 겁이 난다

마지막이란 그렇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테지

 

나무 중에서 제일 굽은 나무들도

이름 모를 잡목들도

숲속으로 몸을 들이미는데

시퍼런 참, 나무가

아, 안된다 바람에도 아니 흔들려야 한다

뿌리박고 곧게 서 있을 때 너는 너인 것이다

절대로 굽히지 않는 그게 너 자신인 것이다

 

* 고독한 사냥꾼 
남자국(男子國)이라는 나라에 사냥꾼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 여자는 없고 남자만 있었다는구나. 사냥만 하고 살았는데 총소리를 허공에 묻고 마을이 울 때 그때가 사냥철이었다는구나. 사냥철이 되면 사냥꾼의 기세가 하늘까지 뻗었는데 그땐 온 마을이 텅 비었다는구나. 그런데 그 텅 빈 마을에 사냥도 나가지 않고 총만 매만지는 한 사냥꾼이 있었는데 사냥철에 사냥도 하지 않는 게 무슨 사냥꾼이냐고 하면 언젠가 때가 오면 꼭 잡아야 할 짐승이 있다고 했다는구나. 그때가 제 사냥철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드디어 그때가 왔다는구나. 그 사냥꾼은 아무도 모르게 넓은 평원으로 나가 오래오래 지평선을 바라보았는데 몰래 뒤를 밟은 사냥꾼들은 숨을 죽였다는구나. 그 사냥꾼이 마침내 그래, 마침내 탕! 무엇인가를 향해 한 방 쏘았는데 그랬는데 그 사냥꾼이 죽을 힘을 다해 쏜 것은 '적막'이었다는구나. 적막이라는 무서운 짐승!

 

* 웃는 울음 
집 어느 구석에서든
울고 싶은 곳이 있어야 한다
가끔씩 어느 방구석에서든 울고 싶은데도
울 곳이 없어
물 틀어놓고 물처럼 울던 때
물을 헤치고 물결처럼 흘러간 울음소리
물소리만 내도 흐느낄 울음은 유일한 나의 방패
아직도 누가 평행선에 서 있다면
서로 실컷 울지 못한 탓이다

집 어느 구석에서든
울고 싶은 곳이 있어야 한다
가끔씩 어느 방구석에서든 울고 싶을 때는
소리 없이 우는 것 말고
몸에 들어왔다 나가지 않는 울음 말고
웃는 듯 우는 울음 말고

저역 어스름 같은 긴 울음
폭포처럼 쏟아지는 울음
울음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울음
집 구석 어디에서든
울 곳이 있어야 한다 *

 

* 사람들  

논둑길 걷다 누군가 무르팍을 툭, 친다 풀잎이다 풀잎 속 풀무치다

풀무치 눈이 퍼렇다 풀 탓이다 풀물 든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에는 풀보다 더 시퍼런 칼날이 있다 풀 베듯 베이는 사람이 있다

 

세종로 지나다 누가 머리통을 텅, 친다 종각이다 종각 속 종이다

이 울지 않는다 세상 탓이다 종 치듯 세상을 치고 싶다

세상에는 종소리보다 더 소리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절필한 종소리 재창하 고 싶은 날들이 있다

소리 울리듯 절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


* 사람의 일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리는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천양희시집[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작가 

 

* 山行
덕성여대 앞 카페 늪을 지나
8번 종점 느티나무 아래서 잠시 쉬다
不二寺 쪽으로 길을 꺾는다
지나온 길이 비뚤비뚤
발가락 어디가 아픈 것도 같다
미로는 처음부터 미로였다
길찾기를 멈추기 전에는
모든 것이 숲처럼 무성하리라 믿었다
배낭을 짊어진 채
나무 뒤에 나무처럼 붙어서니
잡목숲 엉클어진 내력을 알 것도 같다
대낮에도 캄캄한 산숲에 덮여
능선이 찢어져라 널 부르면
어둠도 아름다운 품속이었다
나뭇가지 위로 나그네새 빠르게 스쳐가고
종소리가 흩어지고.....
루비스의 소설 [자카르타의 황혼]을 읽고 있을 때
저 눈물꽃! 수유리가 황혼에 젖는다
언덕길이 너무 가파르다. 내 인생도 가파르게 넘었지만, 本家까지 본질까지 다 버리고 월세월세 하면서

도시에서 세월 보낸 친구
그도 헐떡이며 저 길을 올랐으리라
몸 따로 마음은 자꾸 내려가고
물소리도 따라 내려간다
절은 절대로 길에선 보이지 않는구나
언제나 길의 끝에 가서야 있구나
不二門 밀고 들어서니
대웅전은 목하 보수중이라
헐은 내 마음은 수고로워 몇 년째
보수할 길이 없다
불쌍한 몸이 배가 고픈지, 萬年果를 그리는지, 우울증에 빠진 듯
흐르고 싶은 마음이 우물에 빠진 듯
빠져나오지 않는다
오, 우울과 우물의 깊음이여
절하지 못한 우울이
우물만큼 깊었던가 아니던가
저마다의 슬픔으로 절문이 젖고
經典이 젖고 끝내 할말조차 젖어
勇猛精進 들어간 국민학교 내 친구
일우스님 선방을 기웃거릴 때
불두화 하얗게 웃으며 반기면
이상 더 숨을 수 없어서
나는, 마른 나무 밑에 쌓인다
썩은 잎들이 거름 되는 것을 눈여겨보며
일생을 보기 전엔
거뭇거뭇 남은 누구의 흉터인지..... 죄다 버리고
살 터를 찾아 산속
저 적요 속으로, 반야 속으로 딸려가
아마 나는 피안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산 끝에 가서야
나는 몇 번이나 아제아제 불러본다 *

* 천양희시집[마음의 수수밭]-창비 

 

* 추월산  

   바람이 먼저 능선을 넘었습니다. 능선 아래 계곡 깊고 바위들은 오래 묵묵합니다 속 깊은 저것이 모성일까요 온갖 잡새들, 잡풀들, 피라미떼들 몰려 있습니다 어린 꽃들 함께 깔깔거리고 버들치들 여울 타고 찰랑댑니다 회화나무 그늘에 잠시 머뭅니다 누구나 머물다 떠나갑니다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고 물소리는 자꾸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것이 저렇게 태연합니다 무등(無等)한 것이  저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누가 세울 수 있을까요 저 무량수궁 오늘은 물소리가 더 절창입니다 응달 쪽에서 자란 나무들 이 큰 재목 된다고, 우선 한소절 불러젖힙니다 자연처럼 자연스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저물기 전에 해탈교를 건너야 합니다 그걸 건넌다고 해탈할까요 바람새 날아가다 길을 바꿉니다 도리천 가는 너무 멀고 하늘은 넓으나 공터가 아닙니다. 무심코 하늘 한번 올려다봅니다 마음이 또 구름을 잡았다 놓습니다 산이 험한 듯 내가 가파릅니다 이속(雉谷)고개 다 넘고서야 겨우 추월산 듭니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