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싹 - 공광규
겨울을 견딘 씨앗이
한 줌 햇볕을 빌려서 눈을 떴다
아주 작고 시시한 시작
병아리가 밟고 지나도 뭉개질 것 같은
입김에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도대체 훗날을 기다려
꽃이나 열매를 볼 것 같지 않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꽃이 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아주 약하고 부드러운 시작 *
* 수종사 풍경
양수강이 봄물을 퍼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
*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신을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날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 별국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 겨울 산수유 열매
콩새 부부가
산수유나무 가지에 양말을 벗고 앉아서
빨간 열매를 찢어 먹고 있다
발이 시린지 자주 가지를 옮겨다닌다
나뭇가지 하나를
가는 발 네 개가 꼭
붙잡을 때도 좋아 보이지만
열매 하나를 놓고 같이 찢을 때가
가장 보기에 좋다
하늘도 보기에 좋은지
흰 눈을 따뜻하게 뿌려주고
산수유나무 가지도
가는 몸을 흔들어 인사한다
잠시 콩새 부부는 가지를 떠나고
그 자리에 흰 눈이
가는 가지를 꼭 붙잡고 앉는다
콩새 부부를 기다리느라
가슴이 뜨거워진 산수유나무 열매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
* 공광규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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