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몽산포 일기 1~2 - 이정하

효림♡ 2011. 4. 5. 10:46

* 몽산포 일기(夢山浦 日記) 1 - 이정하  

1
그대와 함께 걷는 길이
꿈길 아닌 곳 어디 있으랴만
해질 무렵 몽산포 솔숲 길은
아무래도 지상의 길이 아닌 듯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참으로 아득한 꿈길 같았습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 좋았던 나는
순간순간 말을 걸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 속마음
서로가 모르지 않기에.
그래, 아무 말 말자. 약속도 확신도 줄 수 없는
거품뿐인 말로 공허한 웃음짓지 말자.
솔숲 길을 지나 해변으로 나가는 동안
석양은 지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운 낙조를 보며
그대는 살며시 내게 어깨를 기대 왔지요.
함께 저 아름다운 노을의 세계로 갈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그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대는 그저 쓸쓸한 웃음만 보여 줬지요.
아름답다는 것,
그것이 이토록 내 가슴을 저미게 할 줄이야.
몽산포, 해지는 바다를 보며
나는 그대로 한 점 섬이고 싶었습니다.
그대에겐 아무 말 못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그대 가슴에 저무는
한 점 섬이고 싶었습니다.

2
걷다 보니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여전히 바다는 우리 발 밑에서 출렁이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제 제 갈 길로 가야 합니다.
또 얼마나 있어야 이렇게 그대와 마주할 수 있을지,
이런 날이 우리 생애에 또 있기나 할는지,
둘이서 함께한 이 행복한 순간들을
나는 공연한 걱정으로 다 보내고 말았고,
몽산포, 그 꿈결 같은 길을 걸으며
나는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내 발 밑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그대 또한 내 삶의 한가운데
밀려왔다 기어이 밀려가리라는 것을,
그대와의 동행이 얼마간은 따뜻하겠지만
더 큰 쓸쓸함으로 내 가슴에 남으리라는 걸.
몽산포, 그 솔숲 길 백사장은 그대로 있겠지만
그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걸.
몽산포, 그 꿈결 같은 길,
아아,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을 간다는 건
못내 쓸쓸한 일이라는 걸. *

* 이정하시집[한 사람을 사랑했네]-자음과모음

 

* 몽산포 일기(夢山浦 日記) 2 
그대는 돌아가자고 했고
나는 조금 더 있자고 했습니다
그대는 어두워졌다고 했고
나는 별이 떴다, 고 했습니다
여전히 몽산포 파도 소리는 그대로입니다만
전에 걸었던 솔숲길도 변함이 없습니다만
지금 나서면 서로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마저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만
어쩐 일인지 그대의 얼굴빛이 예전과 달랐습니다
나는 아직 당신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쩌면 나는 끝끝내 당신 안에서 맴돌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이미 나를 떠날 준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부러 나를 외면하는
당신의 눈빛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지요
마음 급한 그대와는 달리
밤새도록이라도 걷고 싶었던 몽산포 백사장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우리 만남에도 헤어짐이 있겠지만
서둘러 그대를 보내기는 싫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조금이라도 더
그대와 함께 하고픈 마음을 이해하겠는지요
당신이 이미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상관없이
도저히 당신을 보낼 수 없는 내 마음을 아시는지요
당신은 떠나보내도 내 사랑만은 떠나보낼 수 없는
이 참담한 마음을 알고나 있는지요
그대는 잊는다고 했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대는 사랑했다고 했고
나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꿈결처럼 파도소리 들려왔습니다만
꿈결처럼 별빛이 떠 있습니다만
나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몽산포 그 밤바다에
그저 뛰어들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저 빠져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

* 이정하시집[혼자 사랑한다는 것은]-명예의전당

'이정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을 맞는 자세 - 이정하  (0) 2017.03.04
다시 사랑이 온다 - 이정하  (0) 2016.10.18
먼발치에서 - 이정하   (0) 2011.01.25
그를 위해서라면 - 이정하  (0) 2010.04.14
첫눈 - 이정하  (0) 2009.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