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집 담장 위에다 꽃 핀 화분 대신 유리 항아리를 올려놔주렴
행인들 중 몇은 이날을 기다려 찾아온 젊은이.
그중 발 빠른 손이 항아리를 집어 던져 깨뜨릴 테니
깨진 유리 조각을 밟고 혼례의 승낙을 구하려
네 집 대문을 두드릴 테니
* 톡 톡
그 여자는 매니큐어 바르기를 좋아한다 올 터진 스타킹 갈라진 손톱 찢어진 나비날개 분홍빛 벌레구멍 솔기 끝 어디에든,
손가락만한 매니큐어를 만지작거리며 그 여자는
금간 애인과의 사이를 어떻게 메울까 한동안 훌쩍거리다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에 톡, 톡, 매니큐어를 바른다
그래, 톡 톡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겠다
톡톡, 메밀밭 메밀꽃이 하얗게 귀 트이는 소리
톡톡, 호박잎 위에서 배꼽달팽이 발가락 펴는 소리
톡톡톡, 등 푸른 오이가 칼날 위를 뛰어가는 소리
톡톡, 끝여름밤 귀뚜라미망치로 휘어진 철길 두드리는 소리
톡톡, 글자 위를 기어가는 칠점무당벌레 오자 탈자 골라내는 소리
톡톡, 소라고둥이 버얼건 폐선 밑바닥에 붙어 심해를 노크하는 소리
이제 울음 그쳤니?
톡톡, 구름이 눈썹창 여는 소리 *
* 문태준엮음[포옹,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해토
그 창가에 붉은빛이 서로 다른 꼬마장미 몇 분(盆), 얼룩고양이
타오르는 숲길 하나가 지금 창밖을 지나간다
침목처럼 가로누운 나무
그림자들길 가장자리 밝은 그늘에 어느 날의 당신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사월과 오월 사이 당신의 숨은 눈, 그 눈 속으로
그림자의 침묵을 밟고 당신을 태운 기차가 지나간다
중견 의사 모(某)씨의 수련의 시절 임상경험담을 일간지 칼럼에서 본 적이 있다
하루는 울며불며 엄마 손에 끌려온 꼬마 환자를 살폈는데 가슴에 제법 굵다란 종기가 있더라고, 젊은 의사 모씨, 누렇게 곪은 소녀의 젖꽃판을 손가락으로 힘껏 눌러 짰더니 저런! 팥알만한 젖꼭지까지 묻어나 얼결에 피고름의 솜뭉치와 함께 쓰레기통에다 버렸다나? 등줄기며 간담까지 서늘해진 그의 불면의 밤들, 꿈길에서조차 더러 유두 없는 처녀귀신에게 쫓기곤 했다는 것
인근 소읍에서 개업한 지 여러 해, 진찰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녀티 갓 벗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지 불안이나 죄책감은 숨긴 채 청진기를 들이댄 그의 시선 끝에, 새순의 귀여운 젖꼭지가 잡히고 순간 감사와 흥분, 일종의 경외감까지 뒤엉켜 왈칵 눈물이 솟더라고
무엇이, 어떤 신묘한 힘이 그녀 가슴에다 분홍 꽃눈을 다시 돋게 했을까 시간이 지닌 설명 불가능의 복원력, 소녀의 몸에 잠들어 있던 여자가? 그녀 자궁에 잠재태로 기다리고 있을, 태어나지 않은 아가의 무구한 작은 입술이?
우리 몸 안밖에서 일시에, 생명의 한 방향으로 집중해 떠다니는 알지 못할 힘의 총량, 그녀 몸과 그의 마음 대체 어느 부분이 어느 순간에 하나로 만나 그리 힘껏 밀어내고 끄집어당겼을까 돋아 곱다랗게 꽃 피게 했을까 *
* 류인서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비
저 늙은 느티나무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한때 저 느티나무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저곳에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발 빠른 늑대의 시간들이 유행을 낚아채 달아나고
길 건너 유리로 된 새 빌딩이 노을도 데려가고
곁의 전봇대마저 허공의 근저당을 요구하는 요즘
하숙집 문 닫을 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 *
* 구구소한도를 빌리다
겨울 동안 그 매화가족은 굳은 붓끝에 물감을 찍어 일수 찍듯 하루 한 꽃씩, 아홉 꽃을 아홉 번 피워두고 다음 계절로 이사갔다
아닌 봄날, 나는 그들이 버린 그림을 주워 거울 위에 붙이고 그림 속에 나무를 따라간다
꽃이 지는 길을 찾아 가지 끝까지 걸어가볼 참이다
거울 속의 마당은 겨울
나는 찬 꽃자리에 붓 대신 맨발을 얹는다
흐린 날은 윗가지의 꽃, 맑은 날은 아래쪽 가지의 꽃이다
바람 부는 날은 왼쪽 가지의 꽃을 안개가 오는 날은 오른쪽 가지의 꽃을 딛고 다음 가지로 건너간다
눈이 오는 날은 가운데 가지의 꽃을 지난다
이따금 비의 긴 혀가 허공을 건너와 남은 꽃을 따먹는구나
폭우에 오히려 고요해지는 숲처럼 나는 마당가에 앉았다
눈 뜨면 밤이 되고 눈 감으면 낮이 되는 나라의 이야기 책을 태운다
마지막 꽃잎에 닿아서야 봄날의 이별까지가 그 나라 땅이라는 걸 수긍한다
나는 피우지 않은 꽃들과 완성되지 않은 순간을 묻어두었다
그 땅에서 남은 노래를 캐내려면 악기 대신 작은 발굴 망치를 들고 가야 하리라
물 오른 하늘에는 무릎과 발가락을 구부리고 걷는 새들의 둥지
길을 가다 문득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춘 향기를 만난다
오래 잠가둔 수도꼭지에서 붉은 물이 쏟아지는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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