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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에 가시거든 - 나희덕

효림♡ 2011. 4. 15. 08:15

*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 나희덕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 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힌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이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나오며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 나희덕시집[어두워진다는 것]-창비

 

*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

* 문태준[포옹, 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해토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우리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300 

 

* 재로 지어진 옷 

흰 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제 마음 몇 배의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 못 위의 잠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도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 방을 얻다

담양이나 평창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촉촉했다.
ㅡ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번 와서 일할 공간이 필요해서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옥쪽을 가리켰고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ㅡ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만은 우리 이씨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

* 오광수엮음[시는 아름답다]-사과나무
 

* 저 숲에 누가 있다  

밤구름이 잘 익은 달을 낳고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후
숲에서는 ......툭......탁......타닥......
상수리나무가 이따금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제 열매를 던지고 있다
열매가 저절로 터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입술을 둥글게 오므렸을까
검은 숲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말소리,
나는 그제야 알게도 된다
열매는 번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무가 말을 하고 싶을 때를 위해 지어졌다는 것을
......타다닥......따악......톡......타르......
무언가 짧게 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박수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들은 무슨 냄새처럼 나를 숲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어둠으로 꽉 찬 가을숲에서
밤새 제 열매를 던지고 있는 그의 얼굴을
끝내 보지 않아도 좋으리
그가 던진 둥근 말 몇 개가
걸어가던 내 복숭아뼈쯤에......탁......굴러와 박혔으니 * 

* 신경림[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글로세움

 

* 꽃바구니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

* 나희덕시집[야생사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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