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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수사학 1~6 - 손택수

효림♡ 2011. 3. 23. 15:08

나무의 수사학 1 - 손택수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 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 먹는다는 것
도로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

 

나무의 수사학 2
식육점 간판을 가리다
잘려 나간 가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흘러갈 곳을 잃어버린 수액이
전기 톱날 자국 끝에 맺혀 떨고 있는 한때
나무에게 남아 있는 고통이 있다면 이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수로를 잃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의 그
아찔하던 순간도 잠시
빈 소매를 펄럭이듯,
팔 없는 소맷자락 주머니에 넣고 불쑥
한 손을 내밀듯
초록에 묻혀 있는 나무
환지통을 앓는 건 어쩌면
나무가 아니라 새다
허공 속에 아직도
실핏줄이 흐르고 있다는 듯
내려앉지 못하고 날갯짓
날갯짓만 하다 돌아가는, * 

 

나무의 수사학 3 
벚나무의 괴로움을 알겠다

꽃 피는 벚나무의 괴로움을 나는

부끄러움 때문이라 생각한다

 

퇴근길 지하철 계단 위로 벚꽃이 날린다

출입구 쪽에서 흩날리던 꽃잎 몇이

바람을 타고 계단에 날아와 앉는다  

이 지하철역 가까운 곳에서는 얼마 전

철거민들이 불타 죽은 일이 있었지

 

계단 계단 누운 벚꽃을 밟고 오르며 나는 인어를 생각한다

떨어지지 않는 철거민 생각 대신

벚꽃 아래 사진을 찍던 여자들

종아리 맨살에 화르르 달라붙던 꽃비늘과

그이들 가슴에 익어갈 버찌

버찌에 물든 입술처럼 푸르를 바다 생각에 젖는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도리질 도리질

언젠가부터 나는 꽃을 마음 놓고 사랑하지 못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춘투를 읽고,

꽃향기 따라 닝닝거리는 트럭 점포 앞에서는 유랑과 실업을 읽었다

 

벚꽃을 나는 이제 그냥 벚꽃으로만 보고 싶을 뿐인데,

어깨를 스치는 꽃비늘에 사라져버린 인어와

바닥을 씻고 가는 물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도 같은데

 

여기는 불과 재의 시간을 지나온 먼지 한 점이 아직  눈을 감지 못하는 땅

숨결을 타고 들어온 먼지들이 쿨룩쿨룩 잠든 내 몸속을 하얗게 떠돌아다니는 땅    

 

꽃잎이 오르내리는 사람들 구두 밑에서 으깨진다

절반쯤 으깨진 몸을 바닥에 붙이고

날아오를 듯 말듯 들썩인다

 

푹 꺼진 계단 계단 제 몸에 찍힌 발자국을

들었다 놓는 꽃잎, *

 

나무의 수사학 4 
나뭇잎과 푸른 물고기에 대한 비유를 더는 쓸 수가 없다
나무줄기와 강줄기에 대한 비유도 그저 지루하기만 하다

 

여기 하수도관을 뚫고 들어간 나무가 있다
잇몸이 가려운 시궁쥐 이빨처럼
드릴 구멍을 낸 뿌리들

 

만년필로 검은 잉크를 빨아들이듯
관에 들러붙은 오물을 빨아들인다면
내다 버린 아기와 죽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폐수를 따라 올라온다면

 

광기로 부글거리는 늪을 품고 구토를 하는 나무들아
걸러내고 걸러내다 지쳐 게워내는 고통의 초록들아

 

버릴 수 없다 가지와 가지를 물들이고,
가지와 가지 사이 여백까지 푸르스름
번져가기 위해 덧나는 잎이 네 욱신거리는 수사들이라면

 

나무야 나의 시는 조금만 더 낡아야겠구나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쳐가는 만년필 속
폐수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푸른 물고기가 있어 *

 

나무의 수사학 5 
 용케 헐리지 않았다 모래내 대장간 지나갈 때마다 가게

앞에 내다놓은 소철나무 안부를 묻는다 게으름뱅이가 키

우기 좋다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둬도 저 혼자 잘 자라니

한 달에 한두 번 물이나 주면 된다던 소철 시들어버린 등

걸에 못을 박고 물을 준다 못이 녹슬면 녹물이 나무 안으

로 들어가 모자란 철분을 보충해줄 거야 극약처방이라도

하듯 푸석푸석 마른 살갗을 함부로 찔러보는 날들 광석

이 흙으로 둘러싸인 식물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운석을

캐던 연금술사들의 믿음대로 녹슨 못을 푸른 못으로 뽑

아내는 소철 슬레이트 지붕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화덕

속 시우쇠처럼 품고 두드려댄다 땅, 땅, 땅 굳은 땅에 박

힌 새들의 부리 자국처럼 파고 든 침엽마다 뭉친 혈이 풀

리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빛 하나 따끔 살갗을 뚫고 나

오는 대장간 *

 

나무의 수사학 6

공원 화장실 옆에 신갈나무가 있다

누구에게 머리채를 쥐어뜯기기라도 한 듯

이파리 듬성듬성한,

화장실 청소도구함 속에서 아낙이 밀걸레를 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하늘을 쓸고 왔나

싸구려 파마기에 빠져나간 올올

청소가 끝나길 입구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쩌다 아낙의 발뒤꿈치를 바라보는데

해진 양말 밖으로 삐져나온 뒤꿈치가

갈라 터졌다 속살이 다 보일 듯 불가뭄이 들었다

저 마른 살에 바셀린 로션이라도 발라줘야 하는데

아직도 세상 어딘가엔 양말 속에 촉 나간 알전구를 받쳐 넣고

수명이 다한 전구빛 살려내듯 실을 풀어내는 여자가 있지

기운 양말을 신고 구석구석 방 소제를 하시는 어머니가 있지

갈라진 발뒤꿈치에 찰칵, 들어온 불이 꺼질 줄을 모르는 화장실

살갗 터진 나무도 꽃등을 켜들고 서선

올 나간 머리카락 흐린 하늘을 민다 *

 

* 손택수시집[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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