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효림♡ 2011. 3. 25. 13:28

*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대하여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토란잎

우산 같은 것에 대하여 한 번쯤은 이야기하고 갔으면 싶어지네

 

어느 수수롭던 바람의 길 모서리쯤이던가, 어쩌다 토란잎

우산과도 닮았던, 푸릇한 일순이 불쑥 떠올라주거나

흔들리기도 했던 날이 있었다네

 

그게 어디 우산이었겠느냐만, 어깨도 벌써 다 젖어버리고

이마에 찬 빗방울도 토닥였던 것이었지만, 토란잎 우산과도

같았던 것들이여, 그것들은 어쩌면 우리들이 이후로도 오래

견디며 살아가야 할 찌푸린 세월의 저쪽에다 치받아보았을,

그 중에서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을, 한 잎의 까마득한

그리움일 수도 있었다네

 

*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

* 정윤천시집[구석]-실천문학사

 

* 십만 년의 사랑  

1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년의 해가 오르고

십만 년의 달이 이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려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년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2

어쩌면, 십만 년 전에 함께 출발했을지 모를

산정의 별빛 아래

너와 나는 이제서야 도착하여 숨을 고른다  

 

지상의 사람들이

하나 둘 어두움 속으로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우리는 이런 비탈진 저녁 산기슭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는가

여기까지 오는데 십만 년이 걸렸다

 

잠들어 가는 지상의 일처럼 우리는 그만 잠겨져도 된다

더이상의 빛을 따라 나서야 할 모든 까닭이 사라졌다

 

3

천 번쯤 나는 매미로 울다 왔고

천 번쯤 나는 뱀으로 허물을 벗고

천 번쯤 개의 발바닥으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으리라

 

 

한번은 소나기로 태어났다가

한번은 무지개로 저물기도 하였으리라

 

4

물방울들이 모여

물결을 이루는 일만큼이나 멀고도

반짝이는 여정을 우리는 왔다

 

태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난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불려진 나비처럼

날고 또 날아올라서 여기까지 왔다

 

바다인들 거슬려 오르려는 거꾸로 붙은 비늘,

금빛의 역린逆鱗같이는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 산수유, 화염나비 떼  

구례 산동 마을에 소방서도 없이

대책도 없이


산수유, 화염나비 떼


켜켜이 개켜두었던 방 안의 것에서부터

벽장에 가둬놓았던 은밀함까지 들고 나와


흔들리며

흔들리며

널어대기 시작하는


널다가

널다가

지칠 만큼이나 널어버린


막무가내로 널고

죽을 듯이 널기도 하는


그러고 나면, 이 산중엔

누비고 감친 맵시의 누비이불의 바다


어쩌자고

저렇게도 화염나비 떼의 바다

* 정윤천시집[십만 년의 사랑]-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