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유화(山有花) -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 김소월시집[진달래꽃]-미래사
* 산도화(山桃花) 1 - 박목월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라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
*산도화(山桃花)-산 복숭아꽃
*구강산-실제의 강산이 아니라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이상향을 뜻함
*석산-돌산
*버는데-피어나는데
* 찔레꽃 - 송기원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어질머리 흔들리는 봄날 저녁이면
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그런 지경에서
꿈결같이 사람 냄새를 맡곤 하였습니다.
한 번 돌고, 두 번 돌고, 또다시 도는
그런 산모롱이 아래 아늑한 곳에서는
개 짖는 소리, 된장국 냄새, 밥 짓는 연기 속에서
마을의 불빛들 하나 둘 밝게 켜지고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갈 길도 돌아설 길도 모두 어둠 속에 묻혀버릴 때
그대 대신에 느닷없는 수천 수만 찔레꽃 송이들
무언(無言), 무언으로 피어올랐습니다.
그렇게 그대 대신에 피어올라서
돌아설 한 가닥 외길 비추어주었습니다.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램덤하우스중앙
* 꽃 - 도종환
아프게 피지 않는 꽃은 없다
모진 겨울 없으면 백매화도 없다
혹독한 눈보라 있어서 산수유꽃도 있는 것이다
사무치고 사무쳐 꽃 한 송이 피는 것이다
봄 사월에도 눈발 쏟아질 때 있고
황사와 흐린 빗줄기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순간 순간 치열하지 않으면
꽃다지 좁쌀만한 꽃 송이도 필 수 없는 것이다
한 송이 꽃으로 제가 저를 살리고
제가 저를 살려낸 모습 남에게 기쁨이 되고
서 있는 자리만큼 세상 환하게 바꾸며
꽃 한 송이 피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피는 꽃은 어디에도 없다
* 산딸나무, 꽃 핀 아침 - 안도현
나무가 꽃을 피운다고?
아니다, 허공이 피운다
나무의 몸 속에 꽃이 들어 있었던 게 아니다
나무가 그 꽃을 애써 밀어올렸던 게 아니다
허공이 꽃을 품고 있었다
저것 좀 봐라,
햇볕한테도 아니고
바람한테도 아니고
나무가 허공한테 팔을 벌리고
숨겨둔 꽃 좀 내놓으라고,
내 몸에도 꽃 좀 달아달라고,
팔을 벌리고 애원하는 자세로 나무가
허공을 떠받치고
허공을 우러르며
허공에다 경배하고 있는 것 좀 봐라
때가 되면 나무에 꽃은 핀다고?
아니다, 때가 되어야 허공이
나무에다 꽃을 매달아 주는 것이다
산딸나무야,
몸 안에 꽃을 넣어두지 말아라
너는 인제 아프지 말아라
아침까지 몸 안에 술 든
나 혼자 다 아프겠다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산당화 - 김용택
화병 아래
산당화 꽃이 떨어져 있네요.
팔 베고 모로 누워 꽃잎을 바라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산당화 꽃잎은 다섯 장이네요.
산당화 꽃잎이
다섯 장인 줄
알 때
그때
사랑이네요.
산당화
산당화 꽃이
일곱 뼘 저쪽에 모로 누워
나를 가만히 바라보네요.
가지 말아요
가지 말아요
날 보고, 그가
말하네요. *
* 산수국꽃 - 김용택
아침 저녁으로 다니는 산 아래 강길
오늘도 나 혼자 걸어갑니다
산모롱이를 지나 한참 가면
바람결처럼 누가 내 옷자락을 가만가만 잡는 것도 같고
새벽 물소리처럼 나를 가만가만 부르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를 그냥 지나갑니다
오늘도 그 자리 거기를 지나는데
누군가 또 바람같이 가만가만 내 옷깃을 살며시 잡는 것도 같고
물소리같이 가만가만 부르는 것 같아도
나는 그냥 갑니다
그냥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가만히 흔들렸던 것 같은
나무이파리를 바라봅니다
그냥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갑니다
다시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가만히 서 있다가
흔들렸던 것 같은 나뭇잎을 가만히 들춰봅니다
아, 찬물이 맑게 갠 옹달샘 위에
산수국꽃 몇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나비같이 금방 건드리면
소리없이 날아갈 것 같은
꽃이파리가 이쁘디이쁜
산수국꽃 몇송이가 거기 피어 있었습니다 *
* 김용택시집[그 여자네 집]-창비
* 꽃 앞에서 바지춤을 내리고 묻다 - 복효근
급한 김에
화단 한구석에 바지춤을 내린다
힘없이 떨어지는 오줌발 앞에
꽃 한 송이 아름답게 웃고 있다
꽃은 필시 나무의 성기일시 분명한데
꽃도 내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까
나는 나무의 그것을 꽃이라 부르고
꽃은 나를 좆이라 부른다 *
* 백합 -연화리 시편 27 - 곽재구
당신이 고통으로 흔들리는 그 순간마다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에서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당신이 주체할 수 없는 정신의 방황으로
아름다운 긴 머리칼마저 흐트러뜨릴 때
내 마음의 뜨거운 골짜기에서
진실로 순결한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어느 날
당신은 나를 떠나겠지요
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찬란한 바다
모든 파도가 슬픔으로 술렁이는
그날도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에
백합 한 송이 피어납니다.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램덤하우스중앙
* 능소화 -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램덤하우스중앙
* 변산 바람꽃 - 이승철
급하기도 하셔라
누가 그리 재촉했나요,
반겨줄 임도 없고
차가운 눈, 비, 바람 저리 거세거늘
행여,
그 고운 자태 상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살가운 봄바람은 아직,
저만큼 비켜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어쩌자고 이리 불쑥 오셨는지요,
언 땅 녹여 오시느라
손 시리지 않으셨나요,
잔설 밟고 오시느라
발 시리지 않으셨나요
남들은 아직
봄 꿈꾸고 있는 시절
이렇게 서둘러 오셨으니
누가 이름이나 기억하고 불러줄까요.
첫 계절을 열어 고운 모습으로 오신
변산 바람꽃
* 칸나 - 오규원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를 맴돌았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올리고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한동안 퍼부었다 *
* 해국, 꽃 편지 - 진란
잠시 여기 꽃그늘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꽃빛이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나는 걸까요?
당신을 더듬는 동안 내 손가락은 황홀하여서
어디 먼 곳을 날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잠시 어지럽던 동안 바닷물이 밀려오듯
눈물이 짭조름해졌습니다
우리가 자주 머물던 바다를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 어깨에도 해풍이 머물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갔던 게지요
그 때 그 가슴에도 섬이 되었다가 섬이었다가
섬으로 멀어졌던 게지요
이렇게 좋은 풍경, 이렇게 좋은 시를 만나면
순간 돌부처 되어 숨이 막히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경이 되어버립니다
잠시 여기 꽃그늘에 앉아 편지를 씁니다
한 때 꽃이 되었다가 꽃이었다가 꽃으로 져버린 그대
내년에도 다시 오마던 꽃은 그 꽃이 아닐 것이라고
우리의 기억은 늘 다르게 적히는 편지라고
* 진란시집[혼자 노는 숲]-나무아래서
* 헌화가 - 이홍섭
당신에게 바칠 꽃이 다 떨어지면
여기와 일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듣다
아침이 오면 절벽 아래로 꽃처럼 피어날지도
당신에게 바칠 꽃이 다 떨어지면
깨끗이 저를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내 마음 알 때쯤이면 당신도 정처 없이 이곳으로 흘러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게 될 지도 모르니까요 *
* 오광수엮음[시는 아름답다]-사과나무
* 헌화가(獻花歌) - 신라 향가
老獻花歌曰
紫布岩乎邊希 -자포암호변희
執音乎手毋牛放敎遣 - 집음호수무우방교견
吾肹不喩慚肹伊賜等 - 오힐불유참힐이사등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 화힐절질가헌호리음여
자줏빛 바윗가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