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젊은 시 모음 4

효림♡ 2011. 4. 15. 08:19

* 이런 시야가 어디 있느냐 - 정현종 

청계산 능선을 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홀연히

눈앞이 빛 천지다!

진달래꽃 때문이다

천지에 웃음이 가득 

이런 빛 녈반이 어디 있느냐

이런 시야(視野)가 어디 있느냐

(모든 종교들, 이념들, 철학들

그것들이 펼쳐 보인 시야는 어떤 것인가)

이런 시야라면

우리는 한없이 꽃 피리니
웃는 공기 웃는 물 웃는 시방(十方)과 더불어
꽃빛 빛꽃 피리니 *

 

* 산 아래 앉아 - 박정만

메아리도 살지 않는 산 아래 앉아

그리운 이름 하나 불러봅니다.

먼 산이 물소리에 녹을 때까지

입속말로 입속말로 불러봅니다. 

 

내 귀가 산보다 더 깊어집니다. *

 

* 가을밤 - 이대흠

돌이고 달빛이고 둥글어진 날 있었네

 

말 모르는 뻐꾹새 달 베고 떠나갔네 *

 

* 그러나 어느 날 날아가는 나무도 - 허수경

뿌리를 뽑고 날아가는 나무도
공중에서 자라나는 뿌리마저
제 손으로 자르며 날아가는 나무도
별 달을 거쳐 수직도 수평도 아닌 채
날아가는 나무도

공중에 집을 이루고
또 금방,
집 아닌 줄 알고 날아가리라 *

 

*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은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

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

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

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양떼 염소떼 - 이문재

아주 편안한 걸음으로 해 지는 서편으로 걸어갈 수 있다면
풀피리 소리 잔등이나 이마 쪽에서 천천히 풀어지고
양떼 사이로 흐르는 강을 따라 침엽수 무성한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면
발자국이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어
적은 양의 빗물도 고이게 하고 풀잎들을 물에 지치게 하고
가장 가까운 계곡을 찾아내 스스로 흘러나가게 하고
양떼 염소떼 하늘로 올라가 구름의 형상으로 자라나
저것이 양떼 구름이야 염소떼 구름이야 하고
지상의 슬픈 민족들이 신기해하거나 즐거워할 수 있다면
나는 양떼 염소떼 수천 마리 이끌고 어떤 종교의 발생지처럼
죽는 곳을 죽을 때까지 가꾸어놓을 수 있다 *

 

* 금강경 읽는 밤 - 전윤호
내가 잠든 밤

골방에서 아내는 금강경을 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말 안하고 생각 안하고
한 권을 온전히 다 베끼면
가족이 하는 일이 다 잘될 거라고
언제나 이유 없이 쫓기는 꿈을 꾸다가  
놀라 깨면 머리맡 저쪽이 훤하다
컴퓨터를 켜놓고 잠든 아이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속에서
경을 쓰는 손길에 눈발이 날리는 소리가 난다
잡념처럼 머나먼 자동차소리
책장을 넘길 때마다 풍경소리
나는 두렵다
아내는 나를 두고 세속을 벗어나려는가
아직 죄 없는 두 아이만 안고
범종에 새겨진 천녀처럼
비천한 나를 떠나려는가
나는 기울어진 탑처럼 금이 가다가
걱정마저 놓치고 까무룩 잠든다 *

 

* 선인장의 편지 2-가시 - 홍은택 
둥글게 살아야 해!
힘줄을 팽팽하게 안으로 당긴다
질긴 생각 몇 가닥 목숨껏 움키다
놓치다 반작용의 탄력으로
튀어나간다 진초록 갑옷을
화살촉으로 뚫고나가다 부러진 생각, 생각들
부러진 단층 틈으로 쓸개즙이 돋는다
붉은 사막의 암벽 그늘 아래로 당신
내게 목 축이러 올 테냐고 묻고 싶었지만 *

 

* 바지랑대로 하늘을 잴까?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를까? - 조윤희 
1
울 안에 갇혀
속울음 삼키며
꺼이꺼이 기어올라온
호박덩굴
높은 담벼락을 넘었네
독가스의 거리를 내다보며
그래도 새 세상이라고 웃고 있네
넓은 호박잎의 그늘 속으로
살찐 몸을 숨긴 호박덩어리
쭈뼛거리고 있네


2
나팔꽃이 전봇대를 휘감고 오르네
고것 참
겁도 없네 *

 

* 모르는 척, 아프다 - 길상호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윤성택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봄을 옮기지 않겠노라고
원래 있었던 자리가 그대가 자리였노라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 달맞이꽃 - 이홍섭  

한 아이가 돌을 던져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했다 *

 

* 자주 한 생각 - 이기철

내가 새로 닦은 땅이 되어서

집 없는 사람들의 집터가 될 수 있다면

내가 빗방울이 되어서

목 타는 밭의 살을 적시는 여울물로 흐를 수 있다면

내가 바지랑대가 되어서

지친 잠자리의 날개를 쉬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음악이 되어서

슬픈 사람의 가슴을 적시는 눈물이 될 수 있다면

아, 내가 뉘 집 창고의 과일로 쌓여서

향기로운 향기로운 술이 될 수 있다면 *

 

* 새가 먹고 벌레가 먹고 사람이 먹고 - 하종오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새가 날아와 씨째로 낱낱 쪼아 먹지.//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벌레가 기어와 잎째로 슬슬 갉아 먹지//
요렇게 씨 많이 뿌리면 누가 다 거둔대요?//
나머지 네 먹을 만큼만 남는다. *
 

* 문태준엮음[포옹,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해토

 

* 모른다 - 김소연

꽃들이 지는 것은
안 보는 편이 좋다
궁둥이에 꽃가루를 묻힌
나비들의 노고가 다했으므로
외로운 것이 나비임을
알 필요는 없으므로

 

하늘에서 비가 오면
돌들도 운다
꽃잎이 진다고
시끄럽게 운다

 

대화는 잊는 편이 좋다
대화의 너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외롭다고 발화할 때
그 말이 어디에서 발성되는지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시는 모른다
계절 너머에서 준비 중인
폭풍의 위험수치생성값을
모르니까 쓴다
아는 것을 쓰는 것은
시가 아니므로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시 모음 2  (0) 2011.04.19
정호승 시 모음 3  (0) 2011.04.15
김남주 시 모음  (0) 2011.04.05
음식 시 모음 3  (0) 2011.04.01
4월 시 모음   (0) 201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