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정호승 시 모음 3

효림♡ 2011. 4. 15. 08:25

* 밥값 -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 부활

진달래 핀 

어느 봄날에 

돌멩이 하나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돌멩이가 처음에는 

참새 한 마리 가쁜 숨을 쉬듯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더니 

차차 시간이 지나자 잠이라도 든 듯 

고른 숨을 내쉬었다 

내가 봄 햇살을 맞으며 

엄마 품에 안겨 

숨을 쉬듯이 *

 

* 소년

온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나 *

 

* 고비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

 

*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

 

* 짐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길을 떠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짐은 멀리 던져버려도

어느새 다른 사람의 짐이

내가 짊어지고 가는 짐의 절반 이상이다

풀잎이 이슬을 무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 *

 

* 충분한 불행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

 

* 시계의 잠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 하나쯤 지니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를 우연히 다시 찾아

잠든 시계의 잠을 깨울까봐 조용히 밤의 TV를 끈 적이 있을 것이다

시계의 잠속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물 속에 당신의 고단한 잠을 적셔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의 시계는 눈 덮인 지구 끝 먼 산맥에서부터 걸어왔다

폭설이 내린 보리밭길과

외등이 깨어진 어두운 골목을 끝없이 지나

술 취한 시인이 방뇨를 하던 인사동 골목길을 사랑하고 돌아왔다  

오늘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아파트 현관 복도에 툭 떨어지는 조간신문 소리가 침묵처럼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너의 폭탄테러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베고 잠든

노숙자의 잠도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고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오늘

폭설이 내리는 불국사 새벽종 소리가 들린다

포탈라 궁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젊은 라마승의 선혈 소리가 들린다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를

부지런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애인들이 보인다

스스로 빛나는 눈부신 아침 햇살처럼

내 가슴을 다정히 쓰다듬어주는 실패의 손길들처럼 *

 

* 새들을 위한 묘비명

여기

가장 높이 나는 새가 되고 싶었던

밥 먹는 시간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더 길었던

새들의 노숙자 한 마리 잠들어 있다 *

 

* 허공

어머니 바느질하시다기

바늘로 허공을 찌른다

피가 난다

어머니 바늘로 허공을 기워

수의를 만드신다 *

 

*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히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

 

* 선운사 상사화

선운사 동백꽃은 너무 바빠

보러 가지 못하고

선운사 상사화는 보러 갔더니

사랑했던 그 여자가 앞질러가네

그 여자 한번씩 뒤돌아볼 때마다

상사화가 따라가다 발걸음을 멈추고

나도 얼른 돌아서서

나를 숨겼네 *

 

* 정호승시집[밥값]-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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