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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누가 사나 - 이진명

효림♡ 2011. 9. 1. 09:35

* 그 집에 누가 사나 - 이진명 
그 집에 누가 사나
내가 사나
내 외로운 마음이 수족을 움직여
식기를 씻고 사나
그토록 기척 없다니
이슬비 벌써 반나절인데
지우산을 쓰고
오늘도 올라가본 언덕 아래
지붕도 방문도 마당도 대문도
숨죽인 옛 영화의 먼 화면만 같네
방문 열릴 것만 같아
마당의 흰 빨래들 홀홀 걷어들인 것만 같아
그 집에 누가 사나
거울 속에도 이슬비가 내리고
눕고 일어나고 걸어 다니는 한 형상
긴 치마를 끌고
차를 끓이는 노부인이랄지
미망인이랄지
그 집엔 꼭 그런 형상이 살리
지우산에 이슬비 받은 지 오래
하루가 가네
기다려도 하루만 가네
조용할 그 부인의 거동 볼 수 없네
기다리는 마음이 지우산을 접고
이슬비 속을 내려
대문의 고리를 따지
어느새 안에서 방문을 열고 나와 가엾은
마당의 흰 빨래들을 걷어들이지
다시 옛 영화의 화면처럼 숨죽이는 그 집에
누가 사나
내가 사나 내 외로운 마음이
손등에 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한차례 지우산을 흔들며 사나 *

* 이진명시집[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문학과지성사

 

* 정녀(貞女)의 집 영산선원(靈山禪院)
바닷가 황폐한 마을
배 들어오고 나가는 일 없어져버린 옛 포구 마을에
정녀의 집 영산선원이 있습니다
포구 사람들이 버리고 간 갯벌을 넓게 앞자락에 펼치고
둘레의 정적 속에서도 환하게 있습니다
우주일원상에 종신서원한 처녀들
늙거나 젊거나 한 둥근 처녀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 처녀들 끈적이는 갯벌을 끌어안고
검게 이운 바닷숲을 끌어안고
뒤로 소슬한 영산자락 의지해 기도생활합니다
한나절은 모두 뒤 산밭으로 나가 땀 흘리고
돌아오면 우주일원상만큼 둥글고 커단 연못가에 겹겹 꽃을 가꿉니다
둥근 처녀들이 모두 산밭으로 일 나간 사이의
빈 영산선원은 저 홀로 크게 놓인 거울만 같습니다
앞에 와 제 모습 비쳐볼 이라곤 전혀 없는 외딴 장소에
하늘만한 거울이 걸려있는 격이랄까요
그 거울의 고요 헤치며 뜻밖의 손님이 찾아듭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린 게 한 마리 찾아듭니다
모래 익는 하얀 앞마당에 와 먼저 엎드리고
못난 걸음으로 한바퀴 마당을 돕니다
빈 영산선원이 이때처럼 차오르며 거울인 제 얼굴을 다열어
시간의 황금빛 두 팔을 펼쳐드는 것 본 적 없습니다
펄떡이는 억겁 고요의 비늘 거느리는 것 본 적 없습니다
바닷가 황폐한 마을 영산선원에는
뱃길 끊어져 먼바다 넘어오는 큰 배 그리운
어린 게와 우주일원상을 돛처럼 올린 둥근 처녀들이
연년이 같은 조수를 타고 오르내립니다 *

* 이진명시집[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문지

 

* 여행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여자도 첫키스도 첫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번 똑딱 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밤,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빛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래도 한 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라오는 것이라 자꾸 틀린 말을 하더라도 *

* 서정윤엮음[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이가서

 

*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 숲은 검고 짐승의 울음 뜨거웠다. 마을은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몸을 뒤틀며 나무를 밀어댔지만 세상 모르고 잠들었던 새 떨어져 내려 어쩔 줄 몰라 퍼드득인다. 발등에 깃털이 떨어진다. 오, 놀라워라. 보드랍고 따뜻해. 가여워라. 내가 그랬구나. 어서 다시 잠들거라. 착한 아기. 나는 나를 나무에 묶어 놓은 자가 누구인지 생각지 않으련다. 작은 새 놀란 숨소리 가라앉는 것 지키며 나도 그만 잠들고 싶구나.

누구였을까. 낮고도 느린 목소리. 은은한 향내에 싸여. 고요하게 사라지는 흰 옷자락. 부드러운 노래 남기는. 누구였을까. 이 한밤중에.

새는 잠들었구나. 나는 방금 어디에서 놓여난 듯하다. 어디를 갔다온 것일까. 한기까지 더해 이렇게 묶여 있는데, 꿈을 꿨을까. 그 눈동자 맑은 샘물은. 샘물에 엎드려 막 한 모금 떠 마셨을 때, 그 이상한 전언. 용서. 아, 그럼. 내가 그 말을 선명히 기억해 내는 순간 나는 나무기둥에서 천천히 풀려지고 있었다. 새들이 잠에서 깨며 깃을 치기 시작했다. 숲은 새벽빛을 깨닫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 내 너에게로 가노라. 질기고도 억센 밧줄을 풀고. 발등에 깃털을 얹고 꽃을 들고. 돌아가거라. 부드러이 가라앉거라. 풀밭을 눕히는 순결한 바람이 되어. 바람을 물들이는 하늘빛 오랜 영혼이 되어. *

 

* 춤

아이는 지금 춤이다
춤추는 게 아니고 춤이다

 

아이가 식탁머리에서 밥 먹다가 문득 멈추고
뭣에 겨운지 겨운 웃음을 탱탱히 머금고
제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바라보며 두 눈을 빛내다
이윽고 손짓 몸짓 더불어
쟁반의 구슬 굴러간다는 꼭 그런 목소리로 말문을

 

너무 신기해
어떻게 이 손이 이렇게 쭈욱 나가 반찬을 집고
어떻게 이 손이 입속에다 이렇게 밥을 넣을 수 있어
내가 그러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이 손이 저절로 그러는 거야 글쎄
너무 신기하지 않아, 정말 신기해

 

아이는 새 나라를 마셨다
신기함이라는 새 나라
밥 뜨고 반찬 집다가 저를 느닷없이 받쳐올려서
식탁머리에 앉은 채로 공중점프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는 그 한가운데에서
아이는 불꽃 되어 계속 타올랐다

 

오직 신기함만이 일하는 시간, 춤
오직 존재의 불꽃만이 활발발 일하는 시간, 춤

 

* 그렇게 사탕을 먹으며 
더 이상 삶의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
단순화시키고 시키고 시켜서
거의 백지화 다름없다 생각했을 때
오 아주 백지구나 하는 찰나에
온몸을 궁글리며 나는 탄식했다
사탕이 먹고 싶다
귀, 향, 하, 고, 싶, 다

참말 거짓말같이
몇 알의 사탕 살 돈도 없는 지 오래고
안에서는 시간만이 진행하는 때
밖의 넘쳐흐르는 햇살 한 자락 끌어
주머니 적시고 싶지도
얻어 바르고 싶지도 않고
드디어 투명하게 비춰 보이기 시작한
열 손가락의 뼈들
미친다 열 개의 집게이듯
쇠갈고리이듯


......
집게가 쇠갈고리가 덩그라니 떨어지고
창문 너머 지는 햇살이 아양 떨 듯
슬그머니 무릎에 와 앉는다
무릎 위에 와 앉은 햇살이 가냘피 가리키는 곳
연필꽃이통
그 속에는 동전 몇 닢이 먼지에 말려

......
사탕에는 색깔이 많다
단물도 단물이지만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파랑

너 삶이라는 것
너 백지의 큰 입에
빨간색 사탕을 넣어 주련
초록색 사탕을 넣어 주련

귀향의 짧은 부딪는 소리 동그란
더없는 단순함이여
동전소리를 흘리는 세 살 적의 일요일이여
부스러지는 백지의 딱딱한 부스러지는
빨간
거짓말이여 *
* 이진명시집[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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