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거래, 귀거래 - 이홍섭
ㅡ고향에 돌아왔으니 이제 고향은 저 멀리 던져버려야겠다
고향에 짐을 푼 첫날 밤, 이 한 구절이 섬광처럼 지나갔으나
계절이 바뀌어도 뒷 문장이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나그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 입술
수족관 유리벽에 제 입술을 빨판처럼 붙이고
간절히도 이쪽을 바라보는 놈이 있다
동해를 다 빨아들이고야 말겠다는 듯이
입술에다 무거운 자기 몸 전체를 걸고 있다
저러다 영원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리를 잘라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게, 사랑이라는 게
꼭 저 입술만하지 않겠는가 *
* 터미널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
* 터미널 2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 자 모퉁이에서
앳된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 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
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는 앳되고 앳되어
먼 훗날, 맘마의 저 울음을 기억할 수 없고
기역 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은
저 넘치는 울음을 받아줄 수 없다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돌아오는 터미널에서
저기 앳되고 앳된 한 여인이 울고 있다 *
*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
젊은 날, 절에 들어와 처음 의문을 품었던 말은
무슨 거창한 화두 같은 것이 아니라
바람결에 들은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이었다.
화두를 잘못 들어 한평생 행려병자처럼 살아가야 할 스님이나
화두를 잘 들어 한 소식 한 스님이나
간장 종지 같은 머리가 깨지기는 마찬가지.
종재기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삶은 종재기가 깨지도록 가야 하는 그 무엇이기에
이 말 속에는 더덕 애순 같은 지순함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철마다 골짜기, 골짜기를 온통 뒤덮고 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뿌리 속으로 스며드는 더덕 향 같은 것이
이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 속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
* 우리 동네 나이트에서는요
우리 동네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이트클럽이 하나 있는데요, 뭐 서울처럼 물 좋은 나이트는 아니구요, 그냥 동네 아저씨들과 아줌씨 들이 신나게 몸을 흔들다가 눈 맞으면 껴안고 돌다가, 뭐 그러다가 스리슬쩍 자리를 뜨기도 하는 곳인데요....
며칠 전 후배 한 놈이 나이를 건사 못하고 이곳에 들렸다가 한 아줌씨한테 제대로 걸렸는데요, 그 아줌씨는 모처럼 총각 만났다며 구두 뒷굽이 나갈 정도로 신나게 놀았는데요, 문 닫을 때가 되자 잘 놀았다며 후배놈에게 지폐를 몇 장 찔러주고는 부러진 뒷굽을 들고 훠이훠이 사라지더라나요....
며칠 뒤 후배놈이 중앙시장 앞을 지나가는데 웬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그 아줌씨가 어물전에서 고기를 팔고 있더래요, 양손에 싱싱한 산 문어를 움켜쥐고는 시장통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나요....
후배놈은 그렇지 않아도 그 아줌씨가 찔러준 지폐에서 비린내가 났었다며 쪽팔려 죽겠다고 말하는데...... 이눔의 죽은 문어 대가리 같은 놈을 어물전에 내다 팔 수도 없고.....*
*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보네
친구들은 대관령을 넘는 게 꿈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영 너머를 넘어가는 꿈 같은 건 꾸지 않았네
하기 이상하지, 왜 나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길 원했었는지
왜 일찍부터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었는지
하지만 후회 같은 건 없네
내가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바라보는 것은
순전히 흰 자작나무숲 때문이지
대관령을 넘어온 찬 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나는 대관령 정상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흰 자작나무 떼를 상상하게 되네
자작나무 떼를 지나온 하얗고
투명하고, 수정처럼 차디찬 바람 말일세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이 바람을 맞고 싶어서이지
여름 가고, 가을 가고
흰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영 너머 도시에서는 이 바람을 맞을 수 없었다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때문이란 걸
이 아침은 깨우쳐주네
창을 열면
거기 흰 갈기를 날리며
수백 마리 백마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지 *
* 이홍섭시집[터미널]-문학동네
* 이홍섭시인
-1965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0년 [현대시세계] 등단, 1998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2011년 시인시각작품상 수상
-시집[강릉, 프라하, 함흥][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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