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쓸쓸한 날에 - 강윤후

효림♡ 2011. 9. 23. 09:21

* 쓸쓸한 날에 -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들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 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打電하는 것 같기에 *

 

* 梧桐꽃 - 장석남 

다른 때는 아니고,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고 한참만에 고개를 들면 거기에 梧桐꽃이 피었다

살아온 날들이 아무런 기억에도 없다고, 어떡하면 좋은가....그런 평화로움으로 고개를 들면 보라 보라 보라

梧桐꽃은 피었다 오오

무엇을 펼쳐서 이 꽃들을 받을 것인가 *

 

* 딸기 - 장석주 

비애로 단단해진 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의

목록 속에 있다

초록 줄기에 알알이 맺혀 있는 너는

별들의 계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붉은 것은 왜 오래가지 않는가

섹스 후 동물은 왜 슬픈가

차마 꽉 깨물어 터뜨리지 못한 채

혀 위에 올려놓고 굴리는

이 정체불명의 비애가 나를 울린다 *

 

*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 김태동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굵은 글씨로 써내려가리라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갈지라도
나 그 빗물 되어 사랑했었다고 소리치리라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오랜 침묵 뒤 저 금빛 저무는 산 한 그루 나무가 되리니
누구보다 먼저 아름다운 시절 사랑했었다고 목이 메는 갈매기도 세월은 늘
물결 부서지는 암초더미에 걸려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푸르게 푸르게 울고 있듯이
슬픔이 다하는 날 나 돌아보지 않으며
나,
이 아름다운 시절 사랑하여 이곳을 떠난다고 길모퉁이
지워지는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이여
연인이여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간다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

 

* 풀 - 서종택

평생 한 번도

바람에 거슬러 본 적 없었다

발목이 흙에 붙잡혀

한 발자국도 옮겨보지 못했다

눈이 낮아

하늘 한 번 쳐다 보지못했다

발바닥 밑 세상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었으므로

참, 모질게도, 나는 살았다 *

 

* 바람의 노래 - 최형철 

  나는 비록 꽃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를 견딘 매화나무 기다림이 욕되지 않게 해달라 빌었습니다 나는 비록 새가 아니어도 좋으니 나를 잃고 먼 하늘을 헤맨 소쩍새의 소망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 빌었습니다 나는 비록 밥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를 찾아 온 눈밭을 들쑤신 살쾡이의 배고픔이 슬프지 않게 해달라 빌었습니다 나는 천근만근이어도 좋으니 내 안의 무게에 저것들이 떼메고온 짐 다 얹어달라 빌었습니다 내 안에 숨긴 고운 꽃다발 풀어 저것들의 길 위에 뿌려 달라 빌었습니다 오래 더 오래 저것들의 등을 어루만질 수 있게 남은 두 손 잘게잘게 부수어달라 빌었습니다 *

 

* 엽서, 엽서 - 김경미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 서정윤엮음[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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