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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변방은 어디 갔나 - 고은

효림♡ 2011. 9. 1. 09:10

*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고은 

두 번 세 번 당부하구나 

 

삼천리강산이 모조리 서울이 되어간다

오, 휘황한 이벤트의 나라

너도나도

모조리 모조리

뉴욕이 되어간다

그놈의 허브 내지 허브 짝퉁이 되어간다

 

말하겠다

가장 흉측망측하고 뻔뻔한 중심이라는 것 그것이 되어간다

 

서러웠던 곳

어디서도 먼 곳

못 떠나는 곳

못 떠나다

못 떠나다

기어이 떠나는 곳

내 마음의 개펄 바닥  

해거리 명자꽃이 똑똑하던 곳

10년 전과

10년 후가 같았던 곳

어머니의 흐린 경대

거기 계신

한번도 본 적 없던

증조할머니도

못 본 고조할아버지도 함께 살던 곳

아버지쯤이 아득한 과거인 날들

꿈에도 없는 곳

무식한 아버지

묵은밭 어둑어둑 갈던 곳

진리가 마을 안에 있던 곳

내가 잠들면 너도 잠드는 곳

죽은 아저씨 살아 돌아오는 곳

소작료 삼칠제로 뼈 빠져버린 곳

눈 뜰 힘 없어 눈 감고 죽는 곳

낮은 콧잔등으로

호된 가난 견디어온 광대뼈로

제사상 앞에 엎드리던 곳

백년대계 따위 소용없는 곳

궂은비 오는 날 끼리끼리이던 곳

누가 죽으면 모두 상주인 곳

김씨도 장씨 숙부이고

갑씨도 을씨 사촌이던 곳

사또 나리 오시지 않는 곳

커다란 달밤

누군가가 그 달밤에

식칼 갈아 허공 포 뜨며 번뜩이던 곳

의미가 무의미에 고개 숙이는 곳

두고 온 그곳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 백지  
시가 오지 않는밤
며칠째 무인폭격기 공습의 밤
카불 강 골짝
한꺼번에
두 손자와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파슈툰족 노인의 밤
오른쪽 다리 잃은
그 이웃집 굶주린 아이의 밤
피범벅이야말로 생인 밤
슬픔이란 알라란 얼마나 사치냐
얼마나 오랜 장식이냐

나의 백지 위에 시가 오지 않는 밤 *

 

* 부탁 

아직도

새 한 마리 앉아보지 않은

뭇가지

나뭇가지

얼마나 많겠는가

 

외롭다 외롭다 마라

 

바람에 흔들려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어디에 있겠는가

 

괴롭다 괴롭다 마라 *

 

* 은파에서

이만한 가슴이면 좋겠네

잔물결 짓는

이만한 가슴속

그리움이면 좋겠네

 

그대의 반생애 수고 많았네

 

이만한 마음이면 좋겠네

물수제비뜨듯

물수제비뜨듯

어린시절

동그라미 무늬지는

그 마음이면 좋겠네

 

그대의 남은 생애 오고 있네

 

더도 말고

이만한 삶이면 좋겠네

하늘에 달

물에 달

물에 달이면

내 마음에 달 아닌가

그대와 나

이만한 삶이라면 그냥 좋겠네 *

 

*고은시집[내 변방은 어디 갔나]-창비,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