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동두천(東豆川) - 김명인

효림♡ 2011. 8. 8. 09:21

* 동두천(東豆川) 1 -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

 

* 심해 물고기 
수평선에 걸터앉아 심해 낚시꾼들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
어느새 눈높이까지 꼬리를 치렁대면서
흥건하게 퍼덕거림을 쏟아 놓는 저 물고기
찢긴 아가미 사이로 피도 조금 내비치고 있다
심해는 어떤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잡혔을까 발광의 몸 둥글게 말아
천 길 캄캄한 무덤 사이로
고요히 헤엄쳐 다녔을 저 물고기
수압을 견딘 납의(衲衣)를 벗고
한 번도 들어 올려 보지 못한 듯 천 근 공기를 밀치고 있다
심해는 크고 작은 운석의 산실이어서
두터운 고무 옷 껴 입고 철모를

쓰고 납덩일 두른 잠수부들도 다녀올 수 없는 천심(千尋)
물고기 한 마리가 하늘 길이로 끌고 간다
서슬 푸른 비늘 한 장 꽂아 두려고
저 물고기 천애(天涯)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일까 *

* 김명인시집[파문]-문학과지성사

 

* 안개 -송천동 그 해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우리들은 헛간 같은 데다 여자를 그렸다 낯 붉힌

여자애들이 총무에게 달려가고

함께 벌 서도 꿈쩍도 않던 아이 너는

두꺼비같이 불거진 눈두덩에 긁힌 상처 속에서

숨긴 손칼을 꺼내 기둥에다 던지기도 하면서


그 여름 위에 흠집을 만들었다 불볕

쏟아지던 속을 걸어 가을이 가서

바라보면 배고픔조차 견딜 수 없던 긴 날들 지나자

너는 방죽을 따라 힘없이 맴돌기도 하였다 추위 다가와

날마다 더 먼 곳 싸돌던 다리 아래

거지들은 천막을 걷고 떠나가버렸고


어느 날 잠 깨니 개울물 소리는

일일이 내 머리칼마다 부딪치며 흘러

이 세상 꿈 아닌 또 다른 새벽 한기에도 웅크리면

허기 속을 더듬어 너는 어느새

무우밭에 엎드려 있었다 십일월

손 끝보다 매운 바람을 가르며 기차는 달려가고


되살아나는 무서움 살아나는 적막 사이로

먼 듯 가까운 곳 어디 다시 개 짖는 소리 쫓아와

움켜쥐면 손바닥엔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잡혔다 일어서서 힘껏 내달리면 나보다

항상 한 걸음 앞서도

너 또한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한 송천

그 어둠을 휘감고 흐르던 안개


우리는 떠났다 들기러기 방죽 따라 낮게 흐르는

여울을 건너면 저무는 들길

모두 밤인데 어느 눈발에

젖어 얼룩지는 마음만큼이나 어리석게

그 세상 속에도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으면서

믿음이 만드는 부질없는 내일 속으로 우리들은

힘들게 빠져나가면서 *

 

* 줄포 여자   
낡은 유행가 좇아가느라 나 거기 주저앉았다
희망이 숨차느냐고 놀고 먹는 지 벌써 이태째,
포장 친 간이주점에서 보면 바다는
넘을 고개도 없는데 보리 고랑 가득 펴고 있다


남녘엔 봄 지나가고, 몇 년 만의 외출이냐고
한 가족이 아직은 릴 모래톱에 맨발을 적신다
짧은 봄날에는 채 못 피우는 꽃봉오리도 많다
시절이 저 여자에게 유독 가혹했을 것이다


접시에 담겨서도 꼼지락거리는
잘린 낙지발 중년이 입안에서 쩍쩍거릴 때
목포에서는 한창 잘 나갔지요, 거름을 파고들었던
홍어찜이 이제야 콧속을 탁 쏜다


여기도 예전의 줄포 아니라요, 어느새 경계 넘어버린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것 입맛이라고
저 여자, 버릇처럼 손장단으로 이길 수도 없을 붉은
봄꽃 피워 문다 *

 

* 찰옥수수  
평해 오일장 끄트머리
방금 집에서 쪄내온 듯 찰옥수수 몇 묶음
양은솥 뚜껑째 젖혀놓고
바싹 다가앉은
저 쭈그렁 노파 앞
둘러서서 입맛 흥정하는
처녀애들 날 종아리 눈부
가지런한 치열 네 자루가 삼천원씩이라지만
할머니는 틀니조차 없어
예전 입맛만 계산하지
우수수 빠져나갈 상앗빛 속살일망정
지금은 꽉 차서 더 찰진
뽀얀 옥수수 시간들! *

 

* 추분의 코스모스를 노래함  

길섶에 뿌려놓은 코스모스 여름 내내
초록줄기를 뻗더니
길가에 추분의 꽃대들을 잔뜩 세웠다
아침나절에 내려놓는 햇살 제법 선선해졌지만
아직도 한 무더기 무더위가 짓누르는 한낮,
코스모스가 이룩한 생산은 수백 수천
꽃송이를 일시에 피워낸 것인데
오늘은 우주의 깃털바람 그 꽃밭에다
하늘하늘 투명한 햇살의 율동 가득 풀어놓고 있다
알맞게 온 색색의 꽃잎들이 결을 맞춘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지구가
코스모스 잎잎 위에서 저마다의 이륙을 준비한다 *

 

* 어디로? 

과꽃들이 한낮도 못 지지고 물러낸 햇살이

담장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골목길이 몰고 오르는 언덕 저쪽은 잿빛,

누런 이빨 사이에 끼인 듯 탁한 사연이

담장을 타고 넘는다, 한 여자는 비닐장바구니를 들었고

다른 여자는 왼손으로 손지갑을 감쌌다

얼마만큼 늘어졌다 끊기는 말소리 속에

지금 누군가 위중하다

마을버스가 멎자 손지갑이 타고 떠났고

장바구니는 맥 빠진 뒷심을 끌고 언덕길로 올라갔다

 

잔뜩 찌푸렸다 사라져가는 장마구름의 뒤태들,

저런 구름 몇 평 분양받아

품고 있던 비 죄다 쏟아붓게 하면 안 되나

서로가 서로를 삭일 새도 없이

마구 헝클린 실마리뿐인 필생들,

너 여태 여기 웅크리고 있었느냐?

희멀건 햇살이 과꽃의 시체에 왕광을 덧씌우고 있다

 

대양의 한가운데 떠도는 어떤 섬은

쓰레기들이 뭉쳐서 번성한다. 기댈 곳 찾아

서로의 형체가 되는 썩지 않는 시간들,

얼마만큼 감춰지고 지워지다

문득 소스라쳐 깨어나는 통점들,

손잡이만 가득 달린 빈 서랍장 밀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또 어디로? *

 

* 그 나무 
한 해의 꽃잎을 며칠 만에 활짝 피웠다 지운
벚꽃 가로 따라가다가
미처 제 꽃 한 송이도 펼쳐 들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늦된 그 나무 발견했지요.
들킨 게 부끄러운지, 그 나무
시멘트 개울 한 구석으로 비틀린 뿌리 감춰놓고
앞줄 아름드리 그늘 속에 반쯤 숨어 있었지요.
봄은 그 나무에게만 더디고 더뎌서
꽃철 이미 지난 줄도 모르는지, 
그래도 여느 꽃나무와 다름없이
가지 가득 매달고 있는 멍울 어딘가 안쓰러웠지요.
늦된 나무가 비로소 밝혀드는 꽃불성화,
환하게 타오를 것이므로 나도 이미 길이 끝난 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거기 멈춰 서 있었지요.
산에서 내려 두 달거리나 제자릴 찾지 못해
헤매고 다녔던 저 난만한 봄길 어디,
늦깎이 깨달음 함께 얻으려고 한나절
나도 병든 그 나무 곁에서 서성거렸지요.
이 봄 가기 전 저 나무도 푸릇한 잎새 매달까요?
무거운 청록으로 여름도 지치고 말면
불타는 소신공양 틈새 가난한 소지(燒紙) 
저 나무도 가지가지마다 지펴 올릴 수 있을까요? * 

 

* 후포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바라보면
스스로의 깊이로 뒤척이는 물이랑 그 이빨에 패인
어느 어름에 사람들의 집을 앉히고
그렇게 부대껴온 세월만큼 첩첩
산맥으로 꽝꽝 못질해 닫아버린 후포
서울에서 안동으로, 안동에서 영덕으로, 다시 영해로
손마디마다 까칠한 허기 피멍들게 따먹던 망개 덩쿨 틈새로
내 속의 가시울로 찟긴 눈 아프게

보인다, 작은 항구 어디엔가 끊어진 채 떠도는 이별이
퍼져 오르는 저녁연기로도 속절없는 노적露笛
판장 위에 펄럭이는 깃발 그 벼랑 끝에서 무너져 내리는 아뜩한 노을이
내 무슨 허구한 살의 끝에 찍고 끝끝내 뉘우침이 되던
떨리던 날의 입술자국이

눈물 속으로 고개 디미는 물 자멱 쓸쓸히
돌아와 혼자 분주한 검둥오리여,
흰 뺨을 때린,ㄴ 물보라, 파고 든 모래바람에도 쭈그리며
쭈그리며 떠밀린 세월 뜬 부유로 흘러가면서
그게 나는 미움인줄 알았다.
저 수많은 불면에 솟은 돌쩌귀마다 짓찧으며
나는 그곳이 내 뒷심이라고 느끼기라도 했을 것인가?

그렇다, 부두에 매여 출렁 거리던 빈 배들도
옷자락 풀어놓고 어서 떠나라고
해지고 바람 불면 더욱 적막한 눈발로 재촉하던
저 헝클어진 고향의 목소리를 헤아리기라도 했을 것인가?
그것이 썩어서 만들어준 거름 몇 짐으로
내 언제나 비틀거렸을 뿐, 쓰러지지 않고 비틀거렸을 뿐임을
흐려지는, 차창너머로 비로소 보여주는 후포
이제는 눈물겨운 풀꽃 몇 송이로 겹쳐 보이는 

 

* 후포

바다는 조용하다, 헛소문처럼

장마비 양철지붕을 후둘기다 지나가면

낮잠도 무성한 잔물결에 부서져 연변 가까이

떼지어 날아오르는 새떼들

보인다, 어느새 비 걷고

그을음 같은 안개 비껴 산그늘에는

채 씻기다만 버드나무 한 그루

이따금씩 원동기소리 늘어진 가지에 와 걸리고 있다

바람은 성채(城砦)만한 구름들 하늘 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세월 속으로, 세월 속으로, 끌고 갈 무엇이 남아서

적막도 저 홀로 힘겨운 노동으로

문득 병든 무인도를 파랗게 질리게 하느냐

누리엔 놀다가는 파도가 쌓아놓은

덕지덕지 그리움, 한 꺼풀씩 벗어야 할 허물의

쓸쓸한 시절이 네 마음속 캄캄한 석탄에 구워진다

뼈가 휘도록, 이 바닥에서, 너는,

그물코에 꿰여 삶들은, 모른다 하지 못하리

흉어(凶漁)에 엎어져도 우리 함께 견뎠던 여름이므로

키 큰 장다리 제 철 내내 마당가에 꽃을 피워 더 먼

바다를 내다보고 섰는데

스스로 받아 챙기던 욕망은 다 그런 것일까

멈칫멈칫 나아가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자다깨다 자다깨다 눅눅한 꿈들만 어지럽게

헤매며 길을 잃는다

그래도, 눈을 들어 보리라, 저 산들과

산들이 끊어놓은 자리

다시 이어져 달려 나가는 눈물겨운 수평선을

 

* 세월에게

내 늑골의 골짜기마다 핏빛 절이며 세월이여
비 그치니 지금 눈부시게 불타는 계절은 가을
대지의 신열은 가라앉고 생식과 치욕조차 시들어
시월의 잎들과 11월의 빈 가지 사이
걸어갈 작은 길 하나 걸쳐져 있다
잿빛 날개 펼치고 저기 새 한 마리
숱한 사연과 사연도 저희끼리
공중제비로 흩어 구름 흘러간다
목놓아 우는 것이 어디 여울뿐이랴
둔덕의 갈댓머리 하얗게 목이 쉬어도
그리움의 노래 대답 없으니
마침내 위안 없이 걸어야 할
남은 시간이 마저 보인다 *

* 서정윤엮음[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이가서

 

* 김명인시인

-1946년 경북 울진 출생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

-시집[동두천東豆川][파문][꽃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