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내가 흘러 너에게 닿아야 한다 - 박노해

효림♡ 2011. 7. 8. 08:10

* 내가 흘러 너에게 닿아야 한다 - 박노해  

뜨거웠던 날들은 흘러가고

나에게 오라 나에게 오라

피맺힌 속울음 울어도 너는

차가운 강물로 너의 길을 흘러갔다

 

너에게로 내가 가야만 하는가

내가 흘러 너에게 닿아야 하는가

 

옳기 때문에 맞는 것이 아니었다

맞기 때문에 옳은 것도 아니었다

사람에 맞추어낸 옮음이기에

옳음을 현실에 맞추었기 때문에

진실로 살아 있는 옳음일 수 있었다

 

이제 내가 흘러 너에게 닿아야 한다

나의 옳음이 너에게 스며들 때까지

너의 흐름이 나에게 사무칠 때까지

너와 내가 물처럼 불처럼 한 몸으로 흘러서

저 너른 들판 메마른 가슴에

푸른빛으로 다시 살아 오를 때까지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내가 흘러 너에게 닿아야 하리 *  

* [사랑합니다 안녕]-고려문화사

 

* 굽이 돌아가는 길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 

* 박노해시집[사람만이 희망이다]-해냄

 

*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이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

* 박노해시집[오늘은 다르게]-해냄

 

* 사랑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여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

 

*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바람찬 날이다
경주 남산
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흩날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을 품고
천년의 긴 호흡으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밤새 독거방 낡은 창은 덜컹대고
감시등 불빛 아래
유유히 떠도는 민들레 꽃씨처럼
내 영혼은
저문 들길 지나 낯선 산굽이를 돌아서는
출가승의 옷자락처럼 허허로운데
무겁구나 지나온 날
깊어가는 상처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 밤낮 몹시 아픈 날
스스로 치욕의 삭발을 하고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회색벽에
무겁게 토해내는 신열의 부르짖음
무너졌다, 패배했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흘러
그래 지금 침묵의 무덤을 파고
나를 묻는다 나를 암장한다

숨죽인 호곡처럼
머리 푼 밤바람은 쓰러지는데
어둠속으로 얼굴들이 흐르고
해가 길어지고 해가 짧아지고
서리 내리고 눈이 내리고
죄닦음이 다하고 눈 맑아진 어느날
내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씨앗 하나
피투성이 목숨으로 품어온 씨앗 하나

한 순간, 싹.이.틀.까
젖어드는 눈 감으면
벽 그림자

 

* 시다의 꿈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밋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 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 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로
새벽별 빛나다 *

* 신경림엮음[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글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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