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음의 시간을 엿보다 - 이재무
서산 마애석불 돌 속에 새겨진
저 웃음이야말로 꽃 아니고 무엇이랴
무늬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저 꽃은 그러나
잔물결인 양 온몸에 번지는 웃음 하나로
보는 사람 문득 적막 속에 가둬버린다
저 인화의 웃음 속에는 시간이 출렁거린다
보는 이 가슴에 활짝 천진을 꽃피우는
저 웃음이야말로 무소불위 힘 아니고 무엇이랴
태어나 천년을 지지 않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피어 있을 웃음의 잔주름
몸속에 스며 생활의 퍼런 독이 녹는다
저 꽃 낳은 이는 어쩌면
저도 어쩔 수 없는 설움을 살았을 것이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미움을 살았을 것이다
돌 속에 핀 꽃은 한동안 저를 다녀간
사람의 생 안으로 불쑥 얼굴 내밀고
활짝 웃기도 할 것이다 *
* 해산
늦은 밤 산속 임자 없는 밤나무들
다 익어 영근 밤알 연달아 토해놓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도토리나무도
덩달아 바빠져서 바람을 핑계로
몸 흔들어댄다 아람 벌어져 떨어지는
열매들 이마 때릴 때마다 끙, 하고
산은 돌아눕는다 설핏 잠에서 깬 다람쥐
두리번거리다 곧 귀를 열어젖혀
토독토독 열매를 세다 다시 잠든다
저 멀리 인간의 마을은 불 꺼진 지 오래
신혼방 엿보고 오는 길인지
얼굴 불콰한 달빛
숨가쁜 소리로 환한 숲속
나무들 몰래 일어나 바심하느라 여념이 없다
내일 다산(多産) 마친 나무들 눈빛 더욱 맑고
몰라보게 몸은 수척해 있으리라 *
* 운문사
여승들 모여산다는 운문사에 가서
절 내력도 살펴보고 경관도 둘러본 뒤
일주문 나서다가 사하전( 寺下田) 고랑 타고 앉은
스님들을 보았네 토마토처럼 붉게 익은
둥근 얼굴을 하고 삼매에 빠진 듯
땀방울 옷소매로 훔치는, 멀리서도
풀냄새 가득 풍겨오는 여자들 보았네
불쑥, 그 여자들 속에 뛰어들어 나도
한자루 호미 불끈 쥐고 싶었네
그날 나는 구름의 문 열고 들어가
높고 쓸쓸한 경전 한권 읽었네 *
* 봄을 달래다
환하고 눈부신 봄날
까닭없이 아픈 몸을 달래며
가까스로 잠이 드는데 난데없는 확성기 소리
어찌나 크게 짖어대는지
집요하게 달라붙는 잠의 검불 떼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선다 벚꽃 개나리 살구꽃
일열 종대 혹은 이열 종대로 서서
저마다 손나발 불며 주목해달라
꽃잎 한껏 부풀려 외치고 있다
아무렴, 지난겨울 추위는 참으로 혹독하였나니
살아남은 것들의 잔치 어찌 장하지 않으랴
그대들 꽃피운 언변은 귀에 달고 눈에 밝도록
화려하고 유려하구나
하지만 국수틀같이 지치지 않는 입술이여,
오는 봄 가는 봄을 다 헤아리지는 말아다오
화무십일홍이라 했느니라
부디 가지를 떠나는 날은, 새로이
열리는 한생을 다부지게 살아가거라
지난겨울은 참으로 혹독하였나니
나 또한 밤의 거리에서 성난 민심과 함께
자꾸 도지는 광기를 재워
마음의 불꽃 피우고 또 피웠나니 *
* 신발을 잃다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니
아직 길도 들지 않은 새 신 종적이 없다
구멍난 양심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다가
혈색 좋은 주인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다 해진 신 신고 문 밖으로 나오는 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바람에게도 화풀이를 하며 걷는데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하지 않다
그래, 생이란 본래
잠시 빌려쓰다 제자리에 놓고 가는 것
발과 신이 따로 놀다가
서로를 맞추고서야 신발이 되듯
불운도 마음 맞추면 때로 가벼워진다
나는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다짐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에 도장 꾹꾹 찍으며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집으로 간다 *
* 젊은 꽃
때 되면 누구에게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
그 또한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물에 잠긴 자리마다 검게 죽어가는 피부
지나온 생의 무늬는 목까지 차오른다
하루의 팔할을 사색으로 보내는 그,
긴 항해 마치고 돌아온 목선처럼 지쳐있지만
바깥으로 드리운 그늘까지 늙은 것은 아니다
주름 많은 몸이라 해서 왜 욕망이 없겠는가
봄이면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에도 연초록
희망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그리움으로
깡마른 몸 더욱 마르는 것을,
늙은 나무가 피우는 저 둥글고 환한 꽃
찾아와 붐비는 나비와 벌 들을 보라
검은 피부에도 가끔은 꽃물이 든다 *
* 이재무시집[저녁6시]-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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