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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 - 고재종

효림♡ 2011. 5. 27. 08:11

*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 - 고재종 

 

   우리 동네 성만 씨네 산다랑치논에, 그 귀퉁이의 둠벙에, 그 옆 두엄 자리의  쇠지랑물 흘러든 둠벙에, 세상에, 원 세상에,

통통통 살 밴 누런 미꾸라지들이, 어른 손가락만 한 미꾸라지들이 득시글벅시글거리더라니, 그걸 본 거슴팍 벌떡거린 몇몇이,

요것이 뭣이당가, 요것이 뭣이당가, 농약물 안 흘러든 자리라서 그런가 벼, 너도 나도 술렁대며 첨벙첨벙 뛰어들어,

반나절 요량을 건지니, 양동이 양동이로 두 양동이였겄다!

 

   그 소식을 듣곤, 동네 아낙들이 성만 씨네로 달려오는데, 누군 풋배추 고사리를 삶아 오고, 누군 시래기 토란대를 가져오고,

누군 들깨즙을 내오고 태양초물을 갈아 오고, 육쪽마늘을 찧어 오고 다홍고추를 썰어 오고, 산초가루에 참기름에 사골에,

넣을 것은 다 넣게 가져와선, 세상에, 원 세상에, 한 가마솥 가득 붓곤 칙칙폭폭 칙칙폭폭,

미꾸라지 뼈 형체도 없이 호와지게 끓여 내니

 

  그 벌건, 그 걸쭉한, 그 땀벅벅 나는, 그 입에 쩍쩍 붙는 추어탕으로 상치(尙齒)마당이 열렸는데, 세상에, 원 세상에,

그 허리가 평생 엎드렸던 논두렁으로 흰 샛터집 영감도, 그 무릎이 자갈밭에 삽날 부딪는 소리를 내는 대추나무집 할매도, 

그 눈빛이 한번 빠지면 도리 없던 수렁논빛을 띤 영대 씨와, 그 기침이 마르고 마른 논에 먼지같이 밭은 보성댁도 내남없이,

한 그릇 두 양푼씩을 거침없이 비워 내니

 

   봉두난발에, 젓국 냄새에, 너시에, 반편이로 삭은 사람들이, 세상에, 원 세상에, 그 어깨가 눈 비 오고 바람 치는 날을

닮아 버린 그 어깨가 풀리고, 그 핏줄이 평생 울분과 폭폭증으로 막혀 버린 그 핏줄이 풀리고, 그 온몸이 이젠 쓰러지고

떠나 버린 폐가로 흔들리는 그 온몸이 풀리는지, 모두들 얼굴이 발그작작, 거기에 소주도 몇 잔 걸치니 더더욱 발그작작해서는,

마당가의 아직 못 따 낸 홍시알들로 밝았는데,

 

  때마침 안방 전축에선,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이별도 있다고 하매, 한번 놀아 보장께.

기필코 놀아 보장께, 누군가 추어 대곤, 박수 치고 보릿대춤 추고 노래 부르고 또 소주 마시니, 세상에, 원 세상에, 

늦가을 노루 꼬루만 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잘 노니, 아 글쎄, 청천하늘의 수만 별들도 퉁방울만 한 눈물 뗄 글썽이며,  아 글쎄, 구경 한번 잘 하더라니! *

 

산다랑치논 - 다랑논.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되어 있는 좁고 긴 논

둠벙 - '웅덩이'의 방언

쇠지랑물 - 외양간 뒤에 소의 오줌이 괴어 검붉게 썩은 물

상치마당 - 노인을 공경하기 위하여 마련한 자리

봉두난발 - 머리털이 쑥대강이처럼 헙수룩하게 흐트러짐

반편이 - 지능이 보통 사람보다 모자라는 사람

폭폭증 - 폭폭징. '갑갑증'의 방언

보릿대춤 - 발동작 없이 양팔을 굽히고 손목을 접혔다 뒤집었다 하며 좌우로 흔들어 추는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