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선장 불빛 아래 -군산에서 - 강형철
백중사리 둥근 달이
선창 횟집 전깃줄 사이로 떴다
부두를 넘쳐나던 뻘물은 저만치 물러갔다
바다 가운데로 흉흉한 소문처럼 물결이 달려간다
꼭 한번 손을 잡았던 여인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뜨거운 날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할 수 없는 곳을 통과하는 뻘물은 오늘도 서해로 흘러들고
건너편 장항의 불빛은 작은 품을 열어 안아주고 있다
포장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긴 로프에 매달려 고개를 처박고 있는 배의 안부를 물으니
껍딱은 뺑기칠만 허믄 그만이라고
배들이 겉은 그래도 우리 속보다 훨씬 낫다며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묻는다
생합, 살 밑에 고인 조갯물 거기다
한 잔 소주면 좋겠다고 나는 더듬거린다.
물 젖은 도마 위에서 파는 숭숭 썰려 떨어지고
부두를 덮치던 파도는 어느새
백중사리 둥근 달을 데리고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선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마음산책
* 아버님의 사랑말씀 6
너 이놈으 자식 앉아봐 아버지는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그도 못살고 저그도 못살고 오막살이 이 찌그러진 집 한칸 지니고 사는디 넘으 집 칙간 청소하고 돈 십오만 원 받아각고 사는디 뭐 집을 잽혀야 쓰겄다고
아나 여기 있다 문서허고 도장 있응게 니 맘대로 혀봐라 이 순 싸가지 없는 새꺄 아 내가 언제 너더러 용돈 한푼 달라고 혔냐 돈을 꿔달라고 혔냐 그저 맻날 안 남은 거 숨이나 깔딱깔딱 쉬고 사는디 왜 날 못살게 구느냔 말여 왜! 왜! 왜! 아버지 지가 오죽허면 그러겄습니까 이번만 어떻게... 뭐 오죽허면 그러겄냐고 아 그렁게 여기 있단 말여 니 맘대로 삶아 먹든지 고아먹든지 허란 말여 에라 이 순...
그날 은행에 가서 손도장을 눌러 본인 확인란을 채우고 돌아오는 길에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막걸리 한잔 먹고 헌 말은 잊어버려라 너도 알다시피 나도 애상바쳐 죽겄다 니가 어떻게 돈을 좀 애껴 쓰고 무서운 줄 알라고 헌 소링게... *
* 무청 실가리
목이 잘린 채
축 늘어진 머리카락으로
빨랫줄에 걸려 있다
언제쯤에나
시린 세상 풀어헤치고
보글보글 거품 게워내며 끓어오를까
새벽 인력시장 꽁탕 치고 돌아앉은
다리 밑 식객들의
허기진 창자에 몸 풀까 *
* 겨우 존재하는 것들 3
산 아래 모든 집들이
가슴 앞에 불 하나씩
단정하게 달고 있습니다
앓아누운 노모가
자식의 손에
자신의 엷은 체온을 얹듯
세상의 어둠 위에
불들은
자신의 몸을 포갭니다
땀보다도
그림자보다도 긴
흔적들
짚불보다 더 뜨겁습니다
불빛 너머
손금처럼 쥐고 그댈 그리워하던
내 마음도
창호지 밖 그림자로 어룽입니다. *
* 강형철시집[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창비
* 출향(出鄕)
치매 앓는 어머니
집 떠나네
구부러진 허리 펴지 못하고
비척비척 걸으며
딸네집 인천으로 떠나네
백구란 놈 두발 모아 뜀뛰며
마당을 긁고
어머니 세멘 브로크 담벼락에 머리를 기대고
백구야
백구야
부르며 우네
무명수건 한 손에 쥐고
백구야
백구야
부르며 섰네
담벼락의 모래 몇 개
이러시면 안되잖냐며
무너져 내리네 *
* 연가
아픈 만큼 하나쯤의 사랑을
깨달아 행할 수 있다면
몸뚱아리 어느 구석이든
칼로 찢어보고 끌로 후빈다 해도
어느 벌판 허수아비가 못되랴
아무리 아픈 척해도
한 사람의 어깨 위
아심아심 버티고 가는
몇 마디 슬픈 이야기의
잠시 머물다 가는 쉼터도 될 수 없었고
언제나 나는 거짓말쟁이로 남아
끝끝내 구경꾼으로 남아
낯선 서울의 거리에선 늘상
쫓겨다니는 휴지조각럼 구겨진 채
살아 가나니
원컨대 나를 이제 지워버리고
깨끗이 짓밟아버리고
사랑이여, 제발 한번만 내 곁에 와서
지금 떨고 선 저 이웃 곁에서
하지 못한 내 얘기
한번만 해 줄 수 없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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