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차가운 잠 - 이근화

효림♡ 2012. 12. 4. 21:00

* 차가운 잠 - 이근화  

꿈속에서 세차게 따귀를 얻어맞았다

새벽이 통째로 흔들렸고

흔들린 새벽의 공기를 되돌려놓기 위해

전화벨이 울렸다

 

나의 눈은 동그란 벽시계에

나의 눈의 병상의 엄마에게

긴 복도를 따라 걷지만

복도와 두 눈을 맞출 수는 없다

 

일주일 사이 꽃이 졌다

여기저기 팡팡 사진이 터지고

맘껏 담배 연기를 품었는데

나는 왜 빠져나가지 않나

 

고장 난 시계를 어떻게 할까

혈관을 따라 울리는 피의 음악을 또 어떻게 할까

오래전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살비듬 같은 것을

내가 옷처럼 편안하게 입고 있는데

 

거울 속에는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있고

할머니도 아줌마도 아이도 아닌

엄마가 희마하게 손을 뻗는다

 

이백 년 후의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되어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케이크를 푹푹 떠먹을까

 

환멸과 동정의 젖꼭지를 물고 거침없이

이 세계를 생산할 수 있다면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

* 한밤에 우리가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보이지 않는 산
흐르지 않는 강
다가올 여름을 위해 아껴둔 풍경들

불편한 식사를 거절하고
약속을 만들지 않고
형광등 불빛 아래 빛나는 초콜릿 바를 깨문다
끈적한 입속에 가지런한 이름이
다가올 여름을 위해 제대로 썩어간다

퇴근길에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리의 유전자가 냇물같이 흘러서 어디에 이를지 고민하다가
발이 세 개인 수레가 남기는 긴 흔적을 따라가본다

뜨거운 심장을 갖게 해줄 신비의 명약과 어려운 주문이
아이들의 입속에서 예고 없이 흐르겠지
아이들의 턱 밑에 조그맣게 집을 짓고 산다면
다가올 여름을 위해 나의 사람과 너의 사람을 준비하고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보이지 않는 산
흐르지 않는 강
다가올 여름을 위해 아껴둔 풍경들
* 중남미의 장거리 운행 버스.

 

* 국수 

마지막 식사로는 국수가 좋다
영혼이라는 말을 반찬 삼을 수 있어 좋다

퉁퉁 부은 눈두덩 부르튼 입술
마른 손바닥으로 훔치며
젓가락을 고쳐 잡으며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린다

국수는 뜨겁고 시원하다
바닥에 조금 흘리면
지나가던 개가 먹고
발 없는 비둘기가 먹고

국수가 좋다
빙빙 돌려가며 먹는다
마른 길 축축한 길 부드러운 길
국수를 고백한다

길 위에 자동차 꿈쩍도 하지 않고
길 위에 몇몇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오렌지색 휘장이 커튼처럼 출렁인다
빗물을 튕기며 논다
알 수 없는 때 소나기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소주를 곁들일까
뜨거운 것을 뜨거운 대로
찬 것을 찬 대로 *

 

* 나의 밀가루 여행

1

귀머거리나 벙어리들이 공갈빵을 구워 판다

오백 원이어서 말이 필요 없다

천 원이면 두 개를 봉투에 담아준다

공갈빵은 속이 텅 비었지만 한번 터지면 시끄럽다

옷에 들러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맛있다거나 고소하다거나 싸다거나

그런 말 대신에 좀 더 사는 게 어떠냐는 듯이 쳐다보지만

금세 눈빛을 거두고 어둠을 퍼 나른다

골목길에 트럭이 한 대 나방을 모은다

공갈빵은 가볍고 바삭하다

푹 찔러보지만 내 삶은 누아르가 되지 못한다

한 지붕 아래 고요한 손수다가 오가겠지

오늘은 몇 개? 너무 추웠어! 끄덕끄덕 전봇대가 알아듣겠지

 

철판 위에선 뭐든지 납작해지고 순서가 있다

챙챙챙 차례대로 악어를 뒤집느라 바쁜 손

잘 마른 식욕이 정글의 법칙을 만든다

오늘 당신의 사냥은 어땠습니까?

가방에 불룩한 그것은 호랑이 가죽? 사슴의 뿔?

아니 아니 덮고 잘 커다란 잎사귀

지붕을 엮을 질긴 나뭇가지

배가 고프고 졸립니다

악어를 한 마리, 아니 두 마리 잡아먹어야겠습니다

내 말이 맞다는 듯이 꿀이 한 방울 두 방울

아예 주르륵 떨어진다 악어의 눈물처럼

기름진 호떡을 맛있게 먹을 때마다 나는 내 가난을 실감한다

천 원에 다섯 개 하던 것이

이제 특허 받은 녹차호떡 오백 원이다

 

자주 프랑스 아이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철골귀신같은 에펠탑을 지겨워하겠지

날마다 다른 사람들과 입 맞추며

옛날식 다리를 수도 없이 건너겠지

딱딱한 빵을 뜯으며 인생에 관해 논하고 싶다!

그런데 집 앞에 프랑스 빵집이 생기고야 말았다

어쩌자고 개업 축하 세일까지 한다

내가 죽으면 썩지도 않을 거야

프랑스 아이로 태어나지도 못할 거야

고소한 빵 냄새를 풍기며 차가운 땅속에 누워 있다면

개미나 두더지가 찾아오겠지

커다란 눈을 내어주지 내 코는 달콤해

머릿속에는 설탕이 두 컵 고여 있다

설탕물이 흐른다면 한 사람이 생각나고

또 한 사람이 미워지겠지

밀가루를 탐험하느라 나는 내 인생을 허비하고야 말았지만! *

 

* 이근화시집[차가운 잠]-문학과지성사

 

* 이근화시인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우리들의 진화][차가운 잠]

-윤동주문학상(젊은작가상 부문, 2009), 김준성문학상(2010), 시와세계작품상(2011)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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